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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Youth

괜찮을 줄 알았다. 가끔 그런 상상도 하곤 했으니까. 혹시나, 어쩌다가 우연찮게라도 너를 마주치면, 반드시 뺨을 먼저 올려쳐 주겠다고. 술자리에서나, 너를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옛 애인들이 이야기에 웃으며 농담처럼 내뱉던 그 말이 무색했다. 정말로 이렇게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너를 두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안녕, 미미."

 

8년이란 시간은, 너를 무디게 하는 것조차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너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에 나는 8년 전으로 돌아가 버린다. 뺨을 때려주겠다던 내 손은 떨리기만 했고 입술은 굳어버렸다. 쥐어뜯어 뭉개지고 흉터만 남은 내 어린 시절의 심장이 되살아난다. 지독히 아팠던 그 날로 되돌아간다.

 

, 하필 왜 여기에, 이곳에, 내 앞에.

 

 

 

-

얼마간을 서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시선이 느껴진다. 반듯하고 서늘한 그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섣불리 마주 보지 못했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묻고 싶은 말도 많았다. 입속에서, 가슴 속에서 맴도는 수십 가지의 단어 중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다. ‘왜 그랬어.’ 떠오를수록, 많은 것이 생각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아직도 포기 못 한 걸까. 먼저 반응한 것은 결국 너였다. 긴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린다.

 

“정미미.

“……”

“나 안 보고 싶었어?

 

뻔뻔함에 기가 차기도 잠시 목소리에 눈물이 날 뻔했다.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는 것을 다시 한번 듣고 싶다고 기도했던 그 바램조차 지금은 원치 않는 괴로움만 부추겼다. 간신히 억눌렀는데, 이제 다 잊었다고 아무렇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대답조차 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 웃는 것이 느껴진다. 그때는, 이렇게 잘 웃어주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보고 싶었어. 정말로.

 

그만해. 결국,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슬픔과, 그리움이 뒤섞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작 너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줘.

나를 보며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그 눈이,

나를 보고 모든 게 거짓이라고 했던 그 눈이,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절망에 빠뜨리던 그 눈이.

 

그 앞에 나는 또 무너지려 했다. 간신히 쌓아 올렸던 너와의 벽에 금이 간다. 철없고 감정에 충실했던 그때의 내가 겹쳐진다. 간신히 숨을 돌려 목까지 차오른 그 말을 겨우 삼켜냈다. 나도, 너를.

 

“돌아가.

“싫어.

“마음 같아서는, 네 머리채라도 잡고 싶으니까.

 

그것도 괜찮네. 무릎 위에서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바짓자락만 매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얗게 질리고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이 쥐어지고 미세한 떨림이 생겼다. 이를 너무 세게 악물어 턱이 저려왔다. 정말, 한 대 칠까.

 

“미미야. 나 아직 너 잊지 않았어.

 

드르륵, 거칠게 의자가 뒤로 빠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리께에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올라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렸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미씨, 아직도 여기에 있었어? 밥도 안 먹었으면서.

“친구라더니 할 얘기가 얼마나 많겠어.

 

점심을 먹으러 갔던 직원들이 카페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을 향해 한 마디씩 내뱉는다.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사이에 두고, 직원들이 돌아가며 앉는다. 자연스럽게. 다시 펼쳐진 가시방석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

신보라입니다. 안녕하세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그 이름, 석 자. 달콤함과 씁쓸함을 함께 가진 그 목소리.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네가 아니기를, 설마 했다. 나를 그대로 지나치기를 바랐지만 3팀 팀장은 기어코 내 앞까지 왔다. 그녀를 데리고. 그녀는 분명 나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곧이어 능숙하게 웃음 짓는다. 그리고 나오지 않기를 바란 그 한 마디가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안녕, 미미.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떠드는 것은 신보라였다. 고등학교 동창이고, 우리는 정말 친했었다, 라고. 친했지. 일방적인 짧은 안부와 소개를 끝으로 그녀는 자리로 돌아갔고, 간신히 터진 숨을 몰아쉬며 화장실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밀려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미친 듯이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그녀를 외면한 채 나가려고 했지만 붙들렸다. 뿌리치려고 했던 손은 그녀에게 잡히자마자 힘없이 늘어져 버렸다. 정말 최악이었다. 오늘 운세는, 최고였는데 분명.

 

 

 

-

너는 나에게 끝나지 않을 백일몽과 같았다. 아프고, 아팠으며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엔 꿈보다 못한 깨어진 현실이었다. 지금도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눈앞이 흑백으로 물든다. 동의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철없는 그때의 이야깃거리에 대꾸할 수 없었다. 서로 다른 추억으로 물들어 있는 일부 학창시절은 지워버리고 싶은 흉터였다. 잠깐 멈추었던 통증은 다시 나를 두드려 깨운다. 극복해야 함을 알지만, 아픈 것을 알지만 끝나지 않는 성장통과 같았다. 그 누구도 진통제를 건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미미가….

 

결국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함을 표출하는 직원들을 향해 억지로 웃음 지었다. 별로 속이 좋지 않아서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입을 영원히 닫아버리게 할 수도 있었다. 그녀를 이곳에서 보내버리는 방법도 있었지만 나도 망가진다. 그때 너, 나랑 잤잖아. 그리고 너, 나 버렸잖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되새김은 결국 다시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다시 묻어둔다. 힘겹게 쌓아 올린 커리어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쉬워하는 직원들은 신기한 인연에 다시 집중한다. 신보라는 언짢은 듯 자신을 보다가 결국 본인도 이야기를 흘려낸다. 미미도 없는데 얘기하면 재미없죠. 능숙하게 빠져나가고, 조금씩 입을 다문다. 문을 열고 나서는 뒤통수가 욱신거린다. 온몸이, 아팠다.

 

그 후로 회사 내에서까지 그녀와 대화 한마디 더 이어가지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나를 옥죄어왔다. 두통이 생기고 속까지 쓰려오더니 그날 밤 결국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흐릿하게 잊어가던 네 앳되었던 얼굴이, 변한 것 없이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날카롭게 벼려져서 나타난 네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새벽의 감성은 결국 쓰라린 추억에 눈물 맺게 하였다.

 

신보라. 보라야.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는데. 나는 네가 정말 싫어. 네가 정말, 미워.

 

 

 

-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예뻐서. 잔뜩 얼굴을 붉히고 그 말에 대답하자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확실히 저렇게 예쁜 사람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보라는 교복이 정말로 잘 어울렸다. 농담 안 하고 새하얗고 촌스러운 저 교복이 왜 쟤가 입으니까 저렇게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할까. 손잡고 싶어. 제 말에 손바닥을 보이며 쓱 내민다. 반듯하고 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살포시 손을 겹쳤다. 교복만큼 촌스러운 종소리가 울렸다. 보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손을 놓지 않은 채 살짝 끌어당겨 보인다. 종 쳤어.

 

처음 보는 그날 너무 예쁘다고 비속어까지 섞인 본심이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첫인상을 망쳤었다. 그때부터 쫓아다녔다. 너 너무 예뻐. 나랑 친해지자.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네 옆에 항상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때마다 거절은 하지 않지만 나를 받아주지는 않고, 나를 피해 다니지는 않지만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본심이 대체 무엇인지 가늠하기 힘들어질 때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던 순간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평생. 치기 어린 대담함과 열정에 항복한 것일지도 몰랐다. , 정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온했고, 자꾸만 웃음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계속 몸이 떨리고 어찌할 줄을 몰랐으며 그녀가 웃어주거나 나를 꼭 안아줄 때면 너무나 행복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세상이 망해도 좋다고 바랄 정도였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졸레졸레 그녀를 따라간다. 친구들이 지나칠 때마다, 보라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한다. 괴롭히는 거 아닌데. 그때마다 울컥울컥 내뱉고 싶어진다. , 우리 사귀거든?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보라는 비밀로 하자고 했었다. 그녀가 하자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한 적이 없었다. 첫사랑. 아마 보라는 많은 사람의 첫사랑이었을 것이었다. 예쁘고, 착하고, 어른스럽고. 가끔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이거나 저에게만 장난을 치고, 부끄러워하고, 애정이 어린 손길을 보낼 때마다 한껏 어깨가 올라갔다. 이런 모습, 남들은 보지 못했겠지.

 

그렇게 학창시절은 행복할 줄 알았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떨어뜨려 놓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사랑에 관한 대부분의 처음이 그녀였다. 첫 키스, 첫 경험, 사소한 질투와 다툼까지. 일 년을 지내고, 수험생이 되고, 우리는 헤어졌다. 첫 이별, 첫 상처까지. 나는 너무 순진하고 어렸다.

 

일방적이었다. 전화도, 문자도 받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나를 피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차가운 얼굴로, 꾹 다문 그 잔인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지나쳤다. 비참할 만큼 매달렸다. 한 번만, 다시 나를 봐줘.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나를 감싸주었잖아. 그녀는 잔인했다. 거짓말을 했다. 모든 게, 거짓이야. 미미야.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그렇게 끝났다. 나를 버렸다. 나를 떠났다.

 

-

그냥, 연차 쓸까. 기분 탓인 줄 알았던 열병은 결국 몸살로 이어졌다. 어디가 아파서 나는지 모르게 흐르는 눈물과 잠들지 못해 부어버린 눈을 끔뻑였다. 가슴을 너무 쥐어뜯었나. 살갗이 쓸렸는지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힘을 주어서 팔이 저린 것 같기도 하고. , 머리도 아파. 숨을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전화 한 통을 남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배터리도 없던데.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아프지 않겠지. 가라앉겠지. 다시 너를 보아도 무덤덤해질 거야.

 

‘그만하자. 정미미.

‘몰랐어? 보라 남자친구잖아.

‘아마, 두세 달?

 

결국 숨이 막혀서 잠에서 깼다.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 신보라의 애인. 그녀의 애인들. 남자친구. 정말 세상이 무너져내리는 줄 알았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기고, 헤아릴 수 없는 충격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강타하던 그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착각에 빠졌다. 그럼에도 그녀를 욕하지 못했다. 잘못한 게 나 같아서. 내가 조금 더 잘해줄걸. 내가 조금 더 어른스럽게 굴걸.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었을까. 처음엔 미련, 자책. 나중에는 원망, 그리움. 그런 그녀가 다시 나를 감정의 혼돈에 빠뜨린다.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배터리 경고창이 떠 있는 핸드폰 위로 낯선 번호가 뜬다. 진동이 울리는데, 더 큰 진동은 바깥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핸드폰 화면을 툭 건드렸다. 무어라 웅얼웅얼, 반대편에서 제 이름이 들리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는다.

 

“누구.. 뭐라고..

‘정미미. 문 열어.

 

짜릿함이 쓸고 갔다. 누워있는 내내, 꿈을 꾸는 동안 시달렸던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꿈속인가, 싶을 때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문 열어. 대답하지 않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을 때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집 앞이야.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엎어졌다. 잠깐의 갈등은 두통을 심화시켰다. 진짜 온 건가. 일어날까, 보낼까.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다. 너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너의 뻔뻔함과 그 자신감이 나에게도 있었다면, 좋을 텐데. 까무룩 다시 눈이 감겨버렸다. 핸드폰은 결국 전원이 나갔고, 바깥에서 들리던 소리가 멈췄다. 진짜 네가 온 것이라면, 나를 뒤흔들려고 찾아온 거라면 제발, 돌아가.

 

시간 감각이 엄청나게 무뎌졌다. 굳게 닫혀있는 커튼 때문에 해가 떠 있는지, 달이 떠 있는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딘가 아팠다. 미칠듯한 갈증에 결국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거실로 나왔을 때는 창문 너머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 아직 낮인가. 가득 담겼던 물이 비워진 컵이 싱크대에 떨어지며 살짝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다시 방까지 기어들어 가기도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부러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다시 떠올랐다. 누가, 왔었던 것 같은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홀린 듯이 현관문까지 다가갔다. 손잡이를 잡고 덜컥, 하는 소리를 내자 밖에서도 반응이 왔다. 인기척. 스르륵 열린 문틈 사이로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신보라의 얼굴이 보였다. . 그 얼굴에 또 울컥, 울렁거림과 짜증이 한 번에 몰려 올라온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 그 틈을 붙잡는다. 제 얼굴을 훑어보기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짜 아팠던 거야?

“…너 왜 여기 있어.

“네가 날 피하려고 무단결근하는 줄 알았지.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가시돋친 말도 소용없었다. 더 매몰차게 대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결국 들어온 신보라는 불 꺼진 집안을 쓱 보다가 한 걸음씩 다가온다.

 

“어떻게 알고 왔어.

“회사가 좋은 점이 이거지. 네가 아파서 못 나온다는 말에, 눈물 한 방울 흘리려고 했더니 주소랑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던데.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이제 봤으니까 돌아가. 도망칠 곳이 없었다. 힘없이 탁자 모서리에 기대어 주저앉은 자신의 앞에 함께 무릎 꿇고 앉는다. 제발, 돌아가. 제발. 눈앞에, 그리움이 있다. 내가 사랑했던,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 존재가. 끝나지 않고 숨죽여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향한 조각난 마음이 처절함과 분노를 잠재운다. 그녀 앞에서는 나는 아직도 어렸다. 결국,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다. 나는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결국 나는 신보라가 나를 끌어안는 것을 밀쳐내지 못했다. 어깨가 들썩이고, 그간의 응어리진 것들이 터져나간다. 엉망이 된 몰골에도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며 얼굴을 감싸온다. 다정하지 않던 이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나를 무심한 듯 따뜻하게 바라보던 이 눈빛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키스해도 돼?

 

언제부터 물어보고 했다고.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 못할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무언가를 하려 할 때 물어보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전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온 그녀의 입술을 막지 못했다. 포개어진 입술 틈새로 내가 흘린 눈물이 새어 들어간다. 말랑했지만 그녀의 입술은 쓴맛이 났다. 예전처럼 달콤하지 않았지만, 그 느낌에 매료된다. 혀가 엉키기 전 결국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나를 대체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거야.

미안해.

 

그때 듣고 싶었던 그 한마디에 나는 그녀를 용서해 버린다. 그간 미워했던, 내가 아파왔던 그 기간이 무색해진다. 네가 나빠도 상관없었다. 네가 또 나를 버리더라도 나는 너를 욕하면서도 잊지 못해 곪아가겠지. 그리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했던 통증은 영원히 끝나지 못하겠지. 극복하지 못한 아픔은 그녀를 사랑해버린 나의 죄와 용서해버린 나의 미련함 속에 똬리를 틀겠지.

 

“신보라.

“응.

“키스해줘.

 

안아줘.

 

그녀가 웃는다. 미미야, 내가 미워? 미워. 미운데, 너를 너무 사랑해. 끝나지 않아도 괜찮아. 너를 계속 볼 수 있다면. 이렇게라도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더 아파도 괜찮아. 네가 나를 또 버리고 떠나도 상처가 벌어져도 나는 이 자리에서 결국 너를 기다리게 될 거야. 어차피 아플 거라면 네 곁에서 짓물러지고 너를 받아들이고 눈물 흘리게 해줘. 보라야. 나를 안아줘. 다시는 감히 너를 잊으려 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