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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요한 파도



너를 처음 만났던 그 날은 아침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날은 가을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야자가 없는 날이었기에 담임선생님의 부탁으로 일을 도와 드리던 나는 다른 애들보다 조금 늦게 학교를 나섰다.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가며 오늘 나를 휘감는 이 기분은 뭘까. 곰곰이 생각하며 1층에 도착했을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 혹시 우산 있어?

 

 

고양이를 닮은 눈. 어깨를 살짝 스치는 단발머리,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너만의 좋은 향기. 그리고 나와 다른 색의 명찰. 항상 고요한 나라고 생각했는데.

 

 

-. 있어요.

-다행이다 혹시 괜찮으면 버스 정류장까지만 같이 가 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 넣어둔 보라색 우산을 펼쳤다.

네가 내 우산 안으로 들어왔고. 너는 그렇게 고요함에 파도를 일으켰다.

 

 

- 원래 말이 없어?

- 아니요

 

 

당황하는 나의 얼굴을 보며 너는 웃었다.

한발 한발 버스 정류장에 가까워질 때마다 한발 한발 멀어지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내 기도는 소용이 없었다.

 

 

-고마워 정말 너 없었으면 다 젖을 뻔했어. 2학년이야?

-.

-나는 3학년 정미미야. 너는

 

 

너의 그 말에 명찰에 가려져 있던 내 머리카락을 얼른 들었다.

 

 

-보라구나.

 

 

 

웃으며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 나는 확신했다.

앞으로 네가 나의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거라는 걸 그리고 10년이 지나도 이러는 걸 보면 그때 내 확신은 정답이었다.

 

나는 너를 집으로 데려다줄 버스가 오자 도망치듯 너에게 보라색 우산을 손에 쥐어주고 집 방향으로 뛰어갔다.

 

 

 

- 내일 학교에서 돌려주세요!!

 

 

 

너는 얼떨떨한 얼굴로 버스에 탔고 나는 바보 같았던 내 모습을 계속 자책했다.

신보라의 인생에서 제일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그 덕분에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후회하지 않는다. 잘했어 신보라.

 

그렇게 너는 18살과 28살 사이에 나를 흔들어 놓고 있다. 10년 동안 말도 못 하고 이렇게 글로만 써내려 가는 내가 너무도 바보 같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너의 파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 글도 끝이 나고 나는 선택을 하겠지. 아니 이제는 해야만 한다. 너와 내가 신보라 하면 정미미가 떠오르는 친구가 될지, 정미미하면 신보라가 떠오르는 연인이 될지.

마침표가 될지 새로운 문장이 시작될지.

 

 

 

이 일기장이 너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이제는 너에게 말해야만 할 것 같다.

너를 속이는 것도 무척 힘들지만 나를 속이는 것만큼 괴롭고 무기력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너를 처음 만난 다음 날 등교할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이동수업을 갈 때도 눈은 바쁘게 너를 찾았다.

 

 

한창 몰아친 파도가 다시 고요해질 때 쯤. 야자가 끝나고 웃으며 다가오는 너를 보며 나는 또 휩쓸리고 말았다.

 

 

-보라야! 공부 잘했어? 배고프지?

 

 

인사도 없이 덥석 안부부터 묻는 너를 보며 나는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 떡볶이 먹으러가자. 언니가 사줄게

 

 

그렇게 너는 내 팔짱을 끼고 분식집으로 갔다. 떡볶이집에 앉자. 너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시켰다. 정말 많이 시켰다.

 

 

- 자 여기!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이건 선물!

 

 

보라색 우산과 함께 너는 실로 엮은 팔찌를 내밀었다.

너는 그 팔찌가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 있는걸 알까?

 

 

- 감사합니다.

- 너 진짜 말이 없구나.

- 제가 낯을 좀 가려서요

 

 

떡볶이는 정말 맛있었다. 내가 먹은 음식 중에 그날 먹은 분식이 제일 맛있고 소중한 음식이었다.

 

 

 

-수능 얼마 안 남아서 힘드시겠어요.

-? 공부 잘 안 해~ 나랑은 잘 안 맞는 것 같아. 사실 나 연기지망생이거든!

 

 

수줍게 웃는 너를 보며 너보다 예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 연극영화과?

-! 너는 어떤 거 공부하고 싶어?

-저는 불어요.

-불어? 완전 멋있다.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며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너의 그 한마디가 컸다.

 

 

- 언니는 어느 동네에서 사세요?

- 나 여기서 7 정거장 더 가야 해

- 힘드시겠어요 언니

-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 나 언니 아니야

- ?

- 나 빠른년생이거든. 너 몇 월생이야?

- 4월이요

- 오 그럼 나랑 별로 차이도 안 나네!

- 그래도

- 야 괜찮아 이 정미미가 허락한다. 신보라 우리 친구 해. we are friend!

 

 

그렇게 사이다 잔을 드는 너를 보며 나도 웃으며 사이다 잔을 들었다.

 

 

-오 웃으니깐 귀엽다.

-아니에요.

-야 우리 친구라니깐. 말 놔!

-천천히

-

 

 

진지하게 인상 쓰는 너의 미간을 보고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 진짜 고요한 사람이었는데.

 

 

 

-그래 알았어. 미미야

 

 

그렇게 고3 정미미와 고2 신보라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정말 친해졌고 매일매일 하루도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연락을 했다.

늘 자기가 뭐 하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는 정미미를 보며 웃고 있을 때면 친구들은 항상 물어왔었다.

 

 

- 신보라 남자친구 생겼어?

 

 

그럴 때마다 웃으며 넘겼지만 두근거리는 내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그리고 네가 정말 나와 사귀는 사이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너는 수시가 다가오자 점심만 먹고 연기학원을 간다고 했다. 그래서 너와 학교에서는 마주칠 시간이 없어 늘 속상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네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학교의 시험이 있다고 한 그 전날. 야자를 하고 있던 나에게 너는 전화를 했었다. 나는 되도 않는 연기로 화장실로 갔고. 전화를 받았다.

 

 

-보라야

-. 미미야 무슨 일 있어?

-지금 나랑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야자가 끝나기 1시간 정도 남아있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처음 듣는 너의 떨리는 목소리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감독 선생님께 거짓말을 치고 가방을 챙겼다. 솔직히 그때 무슨 거짓말로 둘러대고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미친 듯이 달렸고 달려간 곳에 트레이닝복 차림의 네가 있었다. 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미미야 왜 울어

- 나 너무 긴장돼 보라야

 

 

내 품에 파고들어 우는 너의 몸을 안아주며 확신했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구나.

너의 파도에 너의 향기에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미미야 우리 게임하러 가자.

 

 

울먹이던 네가 고양이처럼 내 품속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게임?

-응 너 게임 좋아하잖아

-노래방도 갈래

-노래방?

-

 

 

끄덕이며 웃는 너의 손을 잡고 게임방으로 갔다. 나를 이기며 웃는 너의 모습이 너무 예뻐 나는 이길 수가 없었다.

 

 

-신보라 게임 너무 못해~

 

 

그런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게임을 그렇게 하고도 무슨 힘이 남아있는지 미미는 노래방에서 진짜 미친 듯이 노래 부르며 춤을 췄다. 정미미 단독콘서트 첫 관객이라며 너는 내게 공책을 뜯어 싸인을 해주었고. 그것도 네가 준 팔찌와 함께 아직도 내 서랍 속에 있다. 그리고 나는 또 확신했다. 정미미는 정말 끼 많은 연예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역시 그 직감도 틀리지 않았고.

28살의 정미미는 지금 최고의 배우가 되어있다.

 

 

노래방이 끝나자 너는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줄게.

 

 

너희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네가 얼마나 떨린 지, 너에게 연기가 어떤 의미인지 그 작은 입으로 나에게 조잘조잘 말하는 너를 보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어떻게든 너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너희 집으로 가는 내내 고민하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다시는 못 낼 용기를 내어 너를 안았다.

내가 먼저. 너를 안았다.

너의 몸이 조금 굳는 것처럼 느낀 건 기분 탓이었을까

 

 

- 잘할 거야. 그냥 정미미답게 해 너는 그걸로 충분해.

 

 

내 품에서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너는 그다음 날 시험을 보았고. 2주 뒤에 나에게 달려와 말했다.

 

 

-보라야 나 합격했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더 행복했다.

정미미는 졸업 전까지 야자 끝나는 나를 기다렸고 영화도 보고 게임방도 가고 가끔 주말에 멀리 바다도 보러 가면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2학년을, 이제 끝이 나는 너의 마지막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렇게 너는 예쁜 대학생이, 나는 고3이 되었다.

 

 

우리의 생활은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역시 기분이 이상했던 그 날 너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라야 나 남자친구 생겼어!

 

 

 

너라는 파도에 휩쓸려 잠겨버린 그 날. 심장이 내려앉은 그 날.

 

 

 

 

 

 

다음 계절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