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의 정미미는 그냥, 같은 반 친구 중 하나. 딱 그 정도에 불과한 존재였다. 아니지, 같은 반 친구라기에도 너무 드문드문 보여서 거의 옆 반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늘 비어있던 교실 한 구석이 모두에게 익숙해져 버릴 만큼, 미미는 수업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들께서도 굳이 빈자리의 이유에 대해 물어보지 않으셨다. 그만큼 우리에게 수영부 정미미의 공백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모두에게 익숙했던 교실 뒷자리의 공백은 어느 순간부터 자리의 주인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아마 중간고사를 치른 이후, 그러니까 대강 하복을 입기 시작했을 쯤일 것이다.
01
학교가 마치고 새로운 강습이 시작하기 전, 적막이 흐르는 수영장은 어느새 익숙한 일상 속 풍경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중간고사가 한 달도 안 남았으니 당분간 쉬어도 된다고 하셨지만..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공부 좀 더 한다고 성적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기분전환은 해줘야 오히려 공부에 더 도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일주일 정도는 수영장 청소를 더 하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을 청소하면서 잔잔한 물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도 절로 잔잔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피구시합에서 이겨서 기분이 좋은 날도, 선생님께 된통 혼나서 기분이 나쁜 날도, 언제나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몰래몰래 물에 발을 담그면 올라오는 시원한 감각도 수영장 청소를 계속하게끔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올해 여름 방학에는 수영이라도 등록해봐야지 하는 의미 없는 결심을 하며 걸어가던 중에 작은 발걸음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분명 사람이 없을 시간인데 누구지? 머리를 감은 탓일까, 끝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한 미미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미미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강당에 울려 퍼졌다. 안녕, 너 우리 반 맞지? 반장. 예상치 못했던 말이라 조금 허둥대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미미의 인사에 반응했다.
"어, 안녕. 오랜만이다, 수영은 이제 마친 거야?"
별 생각 없이 물었던 질문은 이내 긴 대화로 이어졌다. 같은 반으로 지냈던 한 달보다 강당에서의 십 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정미미, 전국체전 금메달이 목표인 정미미, 수학을 꽤나 좋아하는 정미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건물 밖으로 향하는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거친 소나기로 변해 있었다. 미미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 나 우산 없는데..."
분명 별 생각 없이 뱉은 혼잣말로 보였지만, 괜한 오지랖이 앞서 나갔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정미미, 우산이 없는 정미미..
"나 우산 있어, 나랑 같이 가자."
그래도 되냐며 미안한 눈빛을 하는 미미에게 어차피 같은 아파트 단지인데 뭐 어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미미는 그제서야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잘 어울리는, 푸른 빛의 미소가 작은 우산 안에 퍼져나갔다.
02
봄의 설레임은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여름의 무기력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만이 눈치 없이 빠르게 찾아온 더위를 반겨줄 뿐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선풍기의 투덜거림이 교실을 메우기도 잠시, 종소리와 함께 교실 안으로 친구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겨우 지각을 면했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친구들 가운데서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보였다.
"어, 미미 교복 입었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인지 교실 안의 누군가가 제 머릿속에 떠돌던 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말을 내뱉었다. 같은 반이 된 지 거의 2달이 지났지만, 체육복이 아닌 교복 차림의 미미는 꽤나 생소하게 다가왔다. 교복 모델 같다느니, 우리 학교 교복이 원래 이렇게 예뻤냐느니 하는 친구들의 진심 어린 칭찬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칭찬이 익숙하지 않은지 쑥스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던 미미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보라야."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인사하는, 뒤이어 수줍은 웃음을 짓는 미미. 평소와 다른 거라고는 교복 하나뿐인데 괜히 마음이 이상해져 어색한 웃음으로 미미의 인사를 마주하고 말았다. 바보 같아 보였을 게 뻔했기에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우울한 쪽으로 조금은 기울어버렸다.
이런 제 마음을 알 리 없는 미미는 뒤이어 들어오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교실이 꽉 차는 기분이라는 말로 시작된 조회는 방송실로 가야 할 사람은 얼른 가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미미를 비롯한 몇 명의 친구들이 방송실로 향했다. 평소처럼 텅 비어버린 미미의 자리가 어쩐지 허전했다.
평소엔 귀찮아서 쳐다보지도 않던 아침방송이었지만 오늘따라 자꾸만 눈이 갔다. 물론 딱히 특별한 점은 없었다.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체육부에게 상을 건네주는 교장 선생님과 앵글에 금방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친구들까지, 초등학교 때부터 봐왔던 익숙한 장면의 연속이었다. 다만 상을 받고 인사하는 미미의 모습이, 누가 슬로우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느리고 또렷하게 저에게 다가와 어딘지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던 미미 차례가 끝나고서는 방송 시청에 영 흥미가 붙질 않았다. 정해진 순서에 맞춰 상을 받아오는 아이들을 몇 명쯤 더 쳐다보다 결국 다시 문제집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문을 반쯤 읽었을까,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뒷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정미미, 방금 봤던 아침방송처럼 미미가 들어오는 장면이 느리게 펼쳐졌다.
"보라야,"
어? 비어 있던 옆자리에 원래 짝 대신 미미가 앉았다. 당황한 게 표정에서 티가 났던 것일까 미미가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바꿔 달라고 했어, 1교시 전까지만."
뭐라 말하려는 순간,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1교시 전까지 집중하자 얘들아. 괜히 우리에게 하는 말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공부하는 척, 허공에다 볼펜을 휘갈겼다. 선생님 눈치를 보면서 슬쩍 고개를 들려던 순간, 제 앞으로 작은 노트가 들이 밀어졌다.
[나 교복 입은 거 안 이상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너무 불편하다며 울상을 짓는 미미가 있었다. 예쁘다고 있는 그대로 말해주자 괜스레 다른 곳을 보면서 노트만 톡톡 두드리는 미미, 그사이에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미미.
[근데 웬일로 교복이야?]
[대회도 끝났겠다, 오랜만에 교복도 입어보고 싶어서]
오늘따라 반가운 1교시 종이 울렸다. 책상 위로 하나둘씩 교과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물론 떠들썩한 말소리는 덤으로. 미미는 선생님께 들키기 전에 제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 밀듯 몰려오는 서러움을 막기란 힘든 일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내가 그쪽으로 갈게, 미미는 웃음으로 대답했다. 상장을 챙겨 드는 미미의 손을 보고서야 생각이 났다.
"미미야 상 받은 거 축하해."
미미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잠깐 복잡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제 짝이 자리로 오는 바람에 미미의 표정은 곧 풀어졌다. 미미는 상장을 품에 안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라 네가 축하해주니까 더 좋은 것 같다, 고마워."
1교시, 사회문화 선생님께서 교실로 들어오기 전까지 보라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03
더운 교실에서 내내 공부를 하다 보면 수영장의 시원한 공기가 그리워질 때가 종종 생긴다. 그곳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미미의 모습도. 자꾸 떠오르는 미미의 모습에 괜한 시계만 몇 번이고 들여다봐야 했다. 이런 제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것인지, 아직 수업 시간이 10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수업 종료를 외치셨다. 종이 칠 때까지 조용한 분위기를 약속하고 먼저 교실을 나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원한 공기, 시원한 물, 시원한 미미.
이번 시간 교과서를 책상 속에 넣고 미리 다음 시간 교과서를 밖으로 냈다. 이러면 수영장에 조금 더 있어도 되겠지. 혹시 하는 마음에 시계를 쳐다봤지만 아직 9분도 넘게 남아 있었다. 10분이 이렇게까지 긴 시간이었나.. 죄 없는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어딘지 심각해 보이는 부반장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너 맨날 쉬는 시간마다 어디 가? 반장님 없으니까 심심해 죽겠어."
"그냥, 미미한테."
"뭐야, 나는 어디 몰래 남친이라도 만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제서야 찡그려진 미간이 풀렸다. 김기자님, 특종 포착에 실패하셨네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길래, 괜히 한 번 놀려도 보고. 아 그러고 보니,
"너 작년에 미미랑 같은 반이랬지? 그땐 미미 어땠어?"
"미미? 음... 뭐라 할 것도 없어, 볼 수가 없었거든. 난 수영장이 미미네 집인 줄 알았잖아."
이제 쉬는 시간까지 5분도 안 남았음에도 자꾸만 궁금증이 도지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던 때의 미미 이야기, 사실상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고, 교실이 눈에 띄게 떠들썩해졌음에도 보라는 교실에 앉아서 부반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깐 이야기가 지루해질 찰나, 부반장 뒤로 보이는 시계로 시선을 옮긴 보라는 황급히 부반장의 말을 막아섰다.
"나중에 또 얘기해주면 안 될까? 나 그 뭐냐.. 화장실이 급해서!"
그래, 부반장의 대답이 들리기가 무섭게 보라는 뒷문을 통해 교실을 빠져나갔다. 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달리면 수영장까지 갔다 오는데 별 무리가 없으니까... 마음속으로 열심히 계산하며 바삐 움직이던 보라의 발이 일순간 멈춰 섰다. 복도 저 끝에서 보라의 푸른 바다가 여유롭게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04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두려울 만큼 적막한 공기만이 학교에 흐르고 있는 시간. 저 멀리 운동장과 저의 목적지인 수영장, 체육부가 훈련하는 두 곳만이 생기가 넘치는 시간. 가장 활기차야 할 하루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 시간대는 사람을 울적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미미는 가슴 깊이 파고드는 쓸쓸함에 잠식되기 싫어 수영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으로 발을 내딛자 그제서야 사람이 사는 곳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치님의 호루라기 소리, 얼른 오라며 재촉하는 소리임에도 단 한 순간도 밉게 들리지 않았다. 미미는 빠른 걸음으로 대열에 합류해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삑삑-
코치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 명씩 레일 왕복하기를 몇 번, 어느덧 마지막 왕복 타임이 되었다. 몸풀기라고 하지만 대충 했다가는 훈련에도 민폐니까, 미미는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로 들어설 때와는 다른, 기분 좋은 고요함. 미미는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물을 가르는 소리만이 귓속에 울려 퍼졌다.
오늘따라 움직임이 더 가볍게 느껴져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도착점을 앞에 두고 스퍼트를 내려는 순간, 적막한 수면 아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수영하는 거 힘들지 않아? 비 내리던 언젠가, 같은 우산 안에서 들었던 목소리.
여유롭게 물속을 유영하던 미미는 순간 켁켁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서야만 했다. 한두 번의 움직임만 더 있었어도 도착했을 거리인데, 분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얼마 남지 않은 코스를 끝내고서 미미는 물 밖으로 올라왔다.
"미미야 은메달 한 번 받았다고 이렇게 방심할래?"
"죄송합니다.."
눈물이 더 흘러나오지 않도록 입을 앙다물고서 죄 없는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꾸중을 듣는 내내 든 생각이 자신에 대한 실망감도, 코치님에 대한 미움도 아닌 보라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결승선에 모든 게 있다는 마음으로, 어? 방심하지 말고."
몸풀기였기 때문인지 코치님은 그리 오래 끌지 않고 금방 말을 끝내셨다. 덕분에 미미는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 수영부를 따라 풀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직 첫 번째 차례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보여 미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승선, 결승선.. 숨을 크게 들이마신 미미는 다시 시원한 물속으로 들어섰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물속의 흐름마저도 어딘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몇 번의 턴을 마치고나자, 어느새 다시 결승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방심하지 말자 정미미. 그런 다짐도 무색하게 다시금 보라의 얼굴이 제 머릿속을 꽉 채웠다. 결승선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보라, 두 손을 꽉 쥐고서 수면을 쳐다보는 보라. 겨우내 결승선에 손이 닿을 때까지도 머릿속이 온통 보라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수면 위로 고개를 들자, 상상 속의 보라가 있던 자리에는 기뻐하는 코치님의 얼굴이 보였다.
"정미미 신기록! 잘할 수 있으면서 아깐 왜 그런 거야, 어?"
여전히 머릿속을 가득히 채우는 보라의 모습에 미미는 도무지 신기록에 기뻐할 마음이 나질 않았다.
05
내내 수영만 하던 정미미는 물을 닮아가기 시작했는지 조금씩 하루에 젖어 들어갔다. 분명히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교실 뒷자리의 공백은 어느새 생소함과 허전함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에 미미의 존재에 길들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시원한 미미가 자꾸만 그리워졌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회 일까지 바빠져 도무지 수영장에 갈 시간조차 나질 않았다. 진짜 이러다가 더위로 쓰러지는 건 아닐까 몰라..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몇 분 남지 않은 쉬는 시간을 만끽하려는데, 자꾸만 제 옆으로 친구들이 찾아왔다.
"반장, 미미 요즘 바쁘대?"
"미미 다시 수영장으로 이사갔어?"
"보라야, 미미 오늘도 안 오는 거야?"
그러게, 명쾌한 답이라도 내려주고 싶었지만, 저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미소와 함께 대회가 있나 봐, 하고 말해주는 것 정도? 싸웠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문자 몇 번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라며 되묻던 부반장.
그 질문을 듣고서야 아직 자신은 미미의 번호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반장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그게 말이 되냐고 되물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항상 방과 후에 수영장에서 만나는 게 당연했으니까. 요즘은 계속 훈련 모드인지 청소를 하면서 흘긋 쳐다보거나, 청소를 마치고 몇 분씩 기다려봐도 볼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지금도 미미는 그곳에 당연하다는 듯이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보라는 내내 종례 시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오늘은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으로.
그러다 보니 마지막 교시였던 자습시간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잠시 정신을 놓고 보니 노트가 온통 미미의 이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누가 이걸 보기라도 했다면.. 으윽. 제 짝이 육상부라는 사실에 괜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보라는 온통 미미의 이름으로 덮여 못 쓰게 되어버린 종이를 뒤로 넘겼다. 새하얀 새 종이가 제 눈앞에 나타났다. 내내 물속에만 있어서인지 남들보다 배로 하얀 미미가 자꾸만 떠올랐다. 중증인가봐.. 그 와중에도 보라는 습관적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이미 제 손은 펼쳐둔 수학 문제집을 덮고 있었다. 오늘 미미 보게 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새하얀 종이 위에 검정색 글자들이 가지런히 놓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왜 안 나와?]
아냐, 이건 조금 날 선 듯하고..
[다시 시합준비 들어간 거야?]
들어갔다면? 내가 뭘 어쩔 건데...
머릿속을 꽉 채우는 수많은 질문이 보라를 괴롭혔다. 이것저것 적어보던 보라는 마지막으로 적은 문장을 한참이고 바라봤다.
[미미야 보고 싶어]
...
저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와 버린 본심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보라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06
체육도 못 해, 옷도 잘 안 말라, 등하굣길에 자꾸만 가방은 젖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마냥 근 일주일은 비만 내내 내렸다. 일찍 장마를 시작할 거면 귀띔이라도 해주던가, 보라는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랬던 보라였기에 오랜만에 화창하게 시작된 아침은 더욱 반갑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지,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보라는 비통한 마음으로 우산을 챙겨 학교로 떠났다.
언제 맑은 하늘을 보여줬냐는 듯, 먹구름으로 뒤덮힌 하늘은 익숙하게 비를 쏟아부었다. 보라는 오늘따라 조용한 수영장을 청소하며 미미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젖은 머리를 하고 먼저 제게 아는 체를 해주던 미미. 오늘은 미미를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 혼잣말을 누가 엿듣기라도 한 걸까, 청소를 마치고 걸어 나오는 보라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조용한 복도를 울리는 발걸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차게 내리는 비만 쳐다보는 미미. 보라는 처음 만났을 때의 미미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미미야, 우산 안 가져왔어? 같이 쓸래?"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고 마주친 미미의 눈이었지만 어딘가 달라 보였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눈빛. 보라는 왜인지 모르게 미미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응, 고마워."
어? 의외의 대답에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날것의 반응이 멋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 소리, 잠깐의 정적이 있고서야 보라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제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때와 같은 상황, 사뭇 다른 분위기. 보라는 미미가 교실에 오지 않던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재미있다고 웃으면서도 자신이 있는 쪽과 미묘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고, 가끔은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느리게 반응하는 미미. 자꾸만 신경이 미미에게로 쏠렸지만 그럴수록 보라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데 집중하려 애썼다.
오늘따라 더 길게만 느껴졌던 하굣길도 끝이 나고 더 가까이에 위치한 보라네 아파트에 다다랐다. 아파트 현관 밑에 선 보라는 제 우산을 미미에게 건넸다.
"내일 학교에서 주라."
왜 이렇게 보기 힘들었냐, 친구들이 기다리더라, 보고 싶었다, 그동안 참았던 말과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한 마디였다. 미미는 대답 대신 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체중 관리라도 하는지 어딘가 핼쑥해진 모습에 괜스레 미미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다. 보라야, 오랜만에 듣는 제 이름이 낯설었다.
"나 이거 못 돌려줄지도 몰라."
"바쁘면 수영장 건물에 둬도 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미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너랑 있으면 내가 너무 힘들어, 보라야."
보라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수영이 내 전부였는데, 이제 수영할 때조차 네가 자꾸 생각나서 너무 힘들어. 네가 너무 커져 버려서 네가 내 전부가 되어버릴까봐, 멋대로 이런 감정 가져버린 내가, 난 무서워. "
하늘에서도, 보라의 접힌 우산에서도, 미미의 눈에서도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분명히 비가 내리는데 보라의 바다는 자꾸만 작아져만 갔다. 이제 나 볼 일 없을 거야, 미안. 정말 영영 가버릴 생각인지 말을 마친 미미는 뒤를 돌았고, 보라는 그런 미미의 손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미미야 나는, 내 대답은 들어야지. 미미와 보라의 시선이 다시 마주했다.
"나 너 보고 싶었어, 그것도 엄청 많이. 그래서 너 몰래 수영장에서 훈련 구경도 하고, 마치고서 너 올까 봐 한참 기다려도 보고, "
"미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튼, 넌 몰랐겠지만 나도 온통 너였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미미야."
미미의 눈 속에서 푸른 빛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도 너 좋아해. 그러니까 더이상 미안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미미를 껴안은 보라의 어깨가 파랗게 젖어 들어갔다. 둘의 슬픔을 씻어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비는 여전히 세차게도 내리고 있었다. 어딘지 외로워 보였던 보라의 바다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