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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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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고 그랬는데 영원한 이별이 다가왔다. 넌 영원히 내 곁을 떠났다. , 하루만. 너의 곁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전화를 받았다. 믿기 힘든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덜덜 떨려오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겨우 가눈 채 급하게 심야버스를 탔다. 도착한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다. 너를 만나면서 으레 봐왔던 사람들도 보였다.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린 후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저 멀리에 보이는 사진이 네가 아니길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사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분향소에 발을 디뎠을 땐 사진이 완벽하게 보였다. 이쁘게 해맑게 웃고 있는 너의 주변을 에워싼 하얀 꽃들과 코로 전해지는 향에 주저앉았다. 너는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미미. 너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주하던 사람이었다. 달리기를 할 때 가장 빛이 나던. 그 어떤 순간보다 너는 달릴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정미미는 누구보다도 빨랐다. 그런 네가. 인생이라는 그 길마저 가장 빠르게 달려갈 줄은 몰랐다. 너는 30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났다. 정미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달렸다고 했다.


-


"
정미미선수 친구입니다. 혹시 미미 볼 수 있을까요?"


"
저쪽 대기실에 계실 거에요 아마"


출장으로 서울에 올라온 김에 너를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훈련하는 잠실체육관으로 향했다. 원래도 바쁘던 너와 취직을 한 뒤 곧바로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 멀어진 나의 탓에 건 3년 만에 처음 보는 거라 괜스레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떨리는 마음으로 선수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을 지나 운동화 끈을 묶고 있는 네가 보였다.


~ 국가대표


그제야 운동화를 보던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는 너. 나를 보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동굴처럼 환한 입으로 미소를 짓는 너.


신보라? 웬일이야?”


회사 출장 받아서 서울 온 김에 너 보고 싶어서 왔지


~ 감동인데~”


네가 어색하게 웃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아채지 못했다.


너 연습하는 거 봐도 돼?”


안돼~ 선수들만 들어올 수 있어.”


아 아쉽다…. 그럼 끝날 때쯤에 데리러 가도 돼? 이렇게 왔는데 밥이라도 한 끼해야지


좋아 그럼 저녁에 와


그렇게 너와 저녁에 보기로 약속하고 나는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러 향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버린 일에 빠르게 다시 네가 있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아침에 뵈었던 직원분이 알아봐주시곤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해주셨다.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한 뒤 다시금 대기실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아침과 같은 자세로 신발 끈을 풀고 있는 너.


뭐야? 벌써 끝난 거야?”


…? 어어 왔어?”


응 미팅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서…. 갈 때도 없고 여기 와서 너 기다리려고 했지.”


나의 말에 너는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ㅎ


웃으며 말하는 너에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몇 년 만에 보는 거지만, 너는 참으로 언제나처럼 이뻤다. 내가 너의 얼굴에 감탄하는 동안 운동화를 어느새 갈아신곤 끈까지 다 묶은 너는 일어나며 내 손을 잡았다.


"
가자"


"
..?"


맛있는거 먹으러 가야지


손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무작정 너를 따라나서며 물었다.


"
근데 우리 어디가?"


"
너 좋아하는 거 먹으러"


잔말 말고 따라오라며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너는 빠르게 걸었다. 도착한 곳은 닭볶음탕 집이었다. 나는 닭볶음탕을 참 좋아했다. 그러나 운동선수인 너와는 먹을 수가 없었다. 짜고 염분 많고 매운 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너는 그랬었으니까.


미미야...?”


한번쯤은 먹어도 돼. 운동선수도 일탈은 할 수 있잖아



“...”


모처럼 보는 건데 너 좋아하는 거 같이 먹고 싶었어


괜찮다며 내 어깨를 툭 치는 너와 처음으로 닭볶음탕을 먹었다. 맛있게 먹는 너를 보니 행복하기도, 한편으론 항상 식단 관리하느라 맛있는 걸 잘못 먹는 너를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했다. 그렇게 밥을 다 먹어갈 때쯤 너는 더욱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
우리 술.. 먹을까?"


"
뭐라는 거야. 얘가 오늘 왜이래.."

"
.. 너랑 한 번도 제대로 술 먹어본 적 없잖아.. 한번은 먹어보자..."

"
안돼. 너 내일 또 훈련해야 되잖아."

"
내 소원인데..?"


눈썹을 팔자로 축 늘어뜨리곤 그 커다란 눈망울에 아쉬움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짓곤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너에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하면 내가 약해진다는 걸 너무 잘 아는 너이지..


"
뭐 먹고 싶은데?"

"
닭발에 소주!"


"
먹어도 돼..?"

"
..! 짜피 나.. 아니다.. 먹으러 가자 나 너랑 닭발에 소주 먹어보고 싶었어. 내가 닭발 진짜 좋아하는 거 알잖아."


결국 우리는 네가 맛집이라고 그렇게도 칭찬하는 닭발집 앞에 서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20대의 후반이 되어서 처음으로 둘이서 제대로 술을 마셨다. 나의 주량이 원채 유명해서, 너는 못 마시니 자기가 많이 마시겠다며 나에게는 반 잔 자신은 풀 잔을 따르기를 여러 번 결국 우리는 누구라도 할 것 없이 얼굴이 벌게졌다.


"
밈미야..너 내일 훈련할 수 이써어?"


"
..이제 훈련 별로 없어.."

사뭇 짙어진 표정의 너는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
발목이.. 좀 계속 말썽이네.."


나도 기사로 그 사실을 접했었다. 한국 육상의 미래 정미미, 발목부상으로 고전 중.. 뭐 그따위의 제목이었던 것 같다.


“..
괜찮아?”


괜찮겠지..?”

“...”


앞으로 자주 보자 보라야..”


“..
그래

3
년 전, 그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신보라 왔구나?”

너에게 절을 하곤 뒤돌아 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목소리가 들리는 곳엔 두 명의 여자가 서 있었다. 김나영, 한해빈. 이 둘과 나 그리고 정미미는 중, 고등학교 친한 친구들이었다. 자연스레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 이미 빈 소주병이 두세 개 있는 것으로 보아 둘이서 꽤 오래 기다렸나 보다.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다 쓰디쓴 마음을 잊어보고자 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희미해질수록 오히려 너의 얼굴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
미미 보고 싶다


낮게 뱉어낸 진심에 나를 쳐다보는 둘.


그럼.. 좀 시간 날 때 올라와서 한번은 만나주지. 걔가 그렇게 힘들어할 때, 넌 뭐 했어


해빈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한 해빈을 두 팔로 저지하는 나영. 그러나 이미 취할 때로 취한 우리에게 통하지 않았다.

너는? 네가 미미 여자친구였으면 더 잘해줬어야지

정미미 여자친구..? 나 걔랑 사귄 적 없어.. 걔는 항상 너 좋아했어!! 얼굴은 코빼기만큼도 안 보이는 너를...!”

그만하라니까

결국 큰소리를 내는 우리에 더 큰 소리를 내는 나영. 그보다도 듣도 보도 못한 소리에 얼이 빠졌다. 더이상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다. 비틀비틀 일어서는 나에게 해빈이가 소리쳤다.


네가 이렇게까지 안 오지만 않았어도 정미미 저렇게 안됬을거야! 다 너 때문이야


그래 나 때문이다 됐냐 씨발

낮게 뱉어내곤 온 정신에 힘을 쏟아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나를 따라 나온 나영

쟤가 취해서 그래.. 알잖아 한해빈이 얼마나 정미미 좋아했는지..”


“......”


정미미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너를 좋아했어. 네가 아는 줄 알았는데..”


정미미.. 왜 죽었어..?”


...발목부상 심해지곤 운동을 못 하게 됐잖아. 달리기 하나 보고 살아온 애가 발이 완전히 망가지니 많이 힘들었나 봐.. 알잖아 사람들은 빛나는 순간이 지나면 바로 외면해버린다는 것을.. 곁에 의지할 사람도 없고.. 견뎌 내기 힘들어 보이더라..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거야..”


"......"

"
그래도 너 많이 생각했던 것 같더라. 너 보고 싶다고 자주 그랬거든"


“...
나영아 나 이만 가볼게.. 만간에 다시 보자..”


그래..보라야 잘 쉬고 힘내자


결국 나 때문이었구나.. 내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였구나.. 나는 그렇게 걔를 좋아하면서 걔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단 하나도 알지 못했구나. 너무도 쿡쿡 찌르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에 근처 화장실을 찾아 속을 게워냈다. 조금씩 맑아지는 머리에 심장이 아파왔다


.. 미미야 보고 싶다..


아직 전화를 하면 받을 것 같은 너인데.. 괜시리 떨리는 손으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긴장으로 길어지는 통화연결음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어서 들려오는 안내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서글펐다. 삐 소리와 함께 연결된 음성사서함에 나도 모르게 진심을 부었다.


미미야.. 딱 하루.. 아니 3일 만이라도 니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너랑 교복 입고 아무 걱정 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로 한 번만 가고 싶다.. 보고 싶어 미미야.. 너 아직 살아있잖아 말도 안 되잖아. 난 아직 너랑 시작도 안 해봤는데..



횡설수설을 끝에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곤 화면에 보이는 빨간색 동그라미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일단 잠을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어났다.


손을 씻고 나오는 문 앞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할머니 한 분이 앉아계셨다. 그냥 지나치려다 이 밤에 왜 이런 화장실 앞에 계시나 싶어 말을 걸었다.

할머니.. 이런 곳에서 뭐 하세요 얼른 집에 가요

과거에 미련이 남는가 보구나

“..
...?”

3일이야.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금방 시들어 버리거든..”

할머니는 그 말과 함께 유유히 걸어가셨다. 잠시 벙쪄 있다 할머니를 쫓았다. 발걸음 빠르신 할머니를 따라 뛰다 정신없이 차도로 뛰어들었다. 크게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자동차 전조등 빛에 눈이 찌푸려졌다. 아주 빠르게 자동차가 나에게 돌진했다. .. 나도 너를 따라가는구나..


-



뜨거운 햇빛에 눈이 아팠다.



신보라!! 괜찮아?”


어깨를 흔들며 부르는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힘들게 뜨는 두 눈 사이로 희미한 얼굴이 보였다. .......? 깜짝 놀라 급하게 앉았더니 어지러운 머리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괜찮아..?”



허리를 숙여 고개를 들이미는 그 얼굴은 분명 정미미였다. 미미야...! 나도 모르고 일어나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 뭐야 하면서 나를 가볍게 밀어내는 너에 순순히 밀려났다.



! 너 무릎에서 피나!”


그제서야 쳐다본 무릎은 까져서 피가 고여있었다. 그 위로 보이는 치마. 내가 왜 교복 치마를 입고 있지..?


..뭐야..?”


뭔 사람을 쳐놓고 그냥 가냐


무슨..소리야..?”


..? 아까 너 치고 간 자전거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어..”



...? 멍하니 눈만 껌벅이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내 무릎을 조심스레 털어주는 손길에 아이의 얼굴을 주시했다. 분명 맞는데.. 정미미 맞는데... 그사이에 아이는 무릎의 크고 작은 알갱이를 다 떼어내곤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켰다.



가자


어딜...?”



학교. 늦겠다.”



학교..? 정미미.. 교복...? 이게 무슨 일이야.. 아직 상황을 판단하기엔 너무 시간이 짧았다. 그저 정미미의 손에 이끌려 갈 뿐이었다. 거리의 풍경이 낯익은 듯 낯설었다. 뭔가 촌스러운 듯한 건물과 사람들까지. 맞춰 걷던 발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미미야..오늘 몇월 며칠이지...?”



아무리 봐도 2018년은 아닌 듯한 풍경에 묻는 나에 너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7
17일이잖아


몇 년도..?”


“2006



“2006
?!”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자 진짜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너에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학교에 가자고 했다. 꿈인가..? 꿈이면 안 깼으면 좋겠다. 아이 몰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가 너무 아파서 크게 움찔했다. 꿈 아닌가.. 그러면 그 할머니인가... 과거에 온건가..? 여러 생각을 하며 그저 따라 걷고 있는데 이번엔 갑자기 앞서 걷던 아이가 멈추어 섰다. 몇 걸음 차이가 나지않던 거리를 성큼 걸어와선 나의 눈앞에 선 아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조그마한 손을 살며시 나의 이마 위에 올렸다.


보라..어디 아픈 거 아니지..?”


....? 아니야..”



근데 왜 내 이야기 안 들어



..잠시 멍때렸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방학식 끝나고 뭐할 거냐구우


입술 꾸욱 다물고 나를 쳐다보는 그 눈망울. 확실히 어린 미미이긴 하네.



방학식? 언젠데?”


진짜 뭐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너는 말했다. 오늘이잖아. 아 오늘 방학식이구나.. 2006년이면..나는 고2. 나 고2 방학식 때 뭐했지...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12년 전의 하루하루를 기억해내는 건 불가능 했다. 아무 일 없겠지. 나의 학창시절은 학교, , 공부가 전부였으니까.



"
우리 놀까?"



"
진짜? 진짜지?!"



방방 뛰며 얼른 학교를 가자며 나의 손을 잡고 뛰는 너무도 활기찬 고등학생이었다. 고딩때 정미미가 저렇게 귀여웠구나. 너에게 이끌려 도착한 학교를 보는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다녔던 학교인데. 계단을 오르며 괜시리 난간을 만지작거렸다. 복도에 이리저   리 걸려있는 과거 졸업생들의 미술작품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우리 학교 칙칙하진 않았구나. 그때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3년을 다니며 이런 거 하나하나를 보지 못했을까. 걸을 때 간간히 인사를 해주던 친구들의 얼굴도 너무도 어렸다. 내 얼굴도 어린 모습이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교실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어이~ 신보라 정미미~~~"


나란히 앉아있는 김나영과 한해빈. 김나영..왜케 촌스러웠지? 뿔테 안경을 끼고 머리에 실핀을 꽂은 나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나도 너무 촌스러운 거 아니야? 나영의 인사를 무시한 채 교실 뒤편의 거울로 뛰어갔다. 지금의 나보다 조금은 짧은 머리. 신보라 이 어중간한 길이의 머리도 잘 어울렸네. 피부 봐 완전 애기 피부였구나. 나 젊을 때도 이뻤네! 뿌듯해하며 자리에 돌아가는데 해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미미야 오늘 학교 끝나고 뭐해?"



, 기억이 났다. 과거에 해빈이가 미미에게 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해빈이가 미미를 좋아하니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미에게 같이 놀자고 한마디 못해보고 독서실을 갔었다. 과거의 나는 정말 멍청했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고 싶진 않았다.


"
햅ㅣ..."


"
나 오늘 끝나고 보라랑 놀기로 했어!!"


"
..그래?"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큰소리로 대답하는 너. 해빈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해빈아, 미안해. 근데 나도 정말 미미 좋아하거든.. 다시 기회가 생긴 만큼 절대 놓치기 싫어.


-



12
년 만에 교실에 앉아있으니 너무 힘들었다. 그저 고등학생의 내가 대견할 뿐이었다. 이 힘든 학교생활을 어떻게 12년이나 했는가 몰라.. 내 앞자리에 앉은 미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훈련으로 항상 바쁘던 미미는 수업 자체를 잘 들으러 오지도 않았지만, 수업을 듣는 날이면 늘 꾸벅꾸벅 졸았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 보니 그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다. 그러고 보니 미미 매번 훈련 때문에 자주 놀러 가지도 못했는데.. 어디를 데려가지.. 나 고등학교 때 뭐 하고 놀았니.. 밥 먹고 카페 가고..? 그래 노는 게 다 똑같지. 잡생각을 잔뜩 하다 보니 어느덧 방학식은 끝나있었다. 학생들이 자주 가는, 나도 꽤나 자주 갔던 저가의 음식점인 한스델리를 갔다. 느끼한 거 싫다며 토마토 스파게티를 시키는 너. 정미미 너는 모르지 너 대학가 서는 그렇게 까르보나라가 맛있는지 몰랐다며 나한테 전화했었다는 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아주 맛있게 스파게티를 먹었다. 너와의 하루는 정말 빨리 지나갔다. 밥을 먹고 간 카페에서 이것저것 수다를 떠들다 보니 어느새 고등학생 신보라로 완전히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느덧 저녁 8. 길고도 긴 여름의 해가 뉘엿뉘엿 져갈 때, 네가 나에게 말했다. 한강공원에 가자고. 조금은 의아했다. 매일 같이 아침저녁으로 훈련한다고 뛰는 한강공원에 왜 가자고 하는 건지. 그래도 네가 가고 싶은 거니까.




"
뛰어볼래?"



도착하자마자 오른 다리를 쭈욱 뻗어 스트레칭을 하던 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가볍게 뛰는 너의 뒤를 따라 뛰었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도 훨씬 큰 그 공원을 너는 정말 가볍게 뛰었다. 뒤따라 뛰던 나의 숨이 너무 차올라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목에서까지 느껴지는 쿵쾅거리는 맥박에 멈추고 싶었지만, 아직도 내 앞의 너는 뛰고 있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뒤를 힐끗 보더니 나의 상태가 많이 힘들어 보였는지 속도를 늦춰 나의 옆으로 온 아이가 말했다.




"
조금 쉴까?"



그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인 나는 동시에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한강을 앞에 두고 나란히 풀밭에 앉은 우리는 거의 다 지는 해를 보았다.



"
매일 뛰면서 보는 거지만 강 뒤로 넘어가는 태양은 너무 멋있는 것 같아."



숨도 안찬지 너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
저 큰 강을 뛰어넘으면서 아름다운 붉은 빛을 내잖아. 보고 있으면 나도 나를 뛰어넘는 것을 반복해서 제일가는 육상선수가 되고 싶어. 열심히 뛰고 보는 노을이 제일 이쁘더라고. 너도 보여주고 싶었어 보라야."



강이 너의 눈동자에 비쳐 더욱 반짝였다.


"
이쁘다."



-

"
다녀왔습니... 엄마!!"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에서 티비를 보며 수박을 드시는 엄마에게 뛰어갔다. 확실히 엄마는 젊고 이뻤다. 내가 그동안 정말 고생을 많이 시켰구나..



"
우리엄마 진짜 이쁘다."


"
얘가 왜 이래 용돈 필요하니?"


"
그게 아니라 진짜 이뻐서.."


"
왜이래 얼른 교복 갈아입고 와서 수박 먹어"


"
아니야! 나 일찍 잘게"


방에 들어가자마자 교복을 벗었다. 항상 교복이 이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조금 촌스러운 거 같기도 했다. 블라우스를 걸고 치마에 물을 뿌리려고 바지 걸이에 치마를 거는데, 치마 속에 무엇인가 들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주머니 지퍼를 열자 보이는 것은 산수유꽃 3줄기였다.



'
이게 왜 여기 들어있지'



영문을 모르겠으나 이쁜 산수유꽃을 책상 위에 올려두곤 침대에 누웠다. 과거에 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미미는 무엇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외로워서? 그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정미미가 힘들어하는 것도 몰랐을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정미미와 하루종일 있고 싶다.





아침 일찍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났다. 졸린 눈으로 책상 앞에 앉아 정신을 깨우는데 책상에 올려두었던 산수유꽃이 눈에 들어왔다. 한줄기가 시들어있었다.


3일이야.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금방 시들어 버리거든..”


할머니의 말이 생각이 났다. 정신이 확 들었다. 3일 산수유꽃 3줄기. 그 말이구나.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뿐이구나.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한강공원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달리고 달리다 보니 벤치에 앉아있는 네가 보였다. 그 옆에 가서 털썩 앉으니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싶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너.



"
어제 달려보니까 좋아서 나도 좀 달려보려고"


괜히 머쓱함에 돌려 말하자 퍽이나 네가 오래 하겠다고 분명 너 내일까지 나오고 안 나온다며 이야기하는 너에게 그러려나.. 하고 대답했다.

"
미미, 오늘 뭐해?"

"
? 오늘 훈련 가지."

"
언제 끝나?"

"
..저녁 6?"

"
나 너 훈련하는 거 구경가면 안돼?"

"
그래"


네가 훈련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너는 끊임없이 뛰었다. 그렇게 뛰고 갔는데 또 런닝머신을 하더니 그 다음엔 하체 근력운동을 했다. 쉬지도 않고 한참을 훈련을 하던 너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나의 곁으로 왔다.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내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보라 안 심심해?”

! 근데 미미야 안 힘들어?”

힘들지.. 근데 뿌듯해.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라 운동 덜 해서 괜찮아.”

그럼 평소엔 더해..?”

그렇지..? 특히 겨울엔 체력이랑 근력 비축한다고 하루종일 근력운동 밖에 안 해

네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하는 지 몰랐다. 너에게 달리기는 정말 큰 것이구나. 그래서 너는 그러한 선택을 한 걸까..


저녁까지 너의 훈련을 지켜보았다. 7시가 되어서야 끝이 난 훈련. 코치님이 주신 샐러드를 나눠먹곤 밖으로 나왔다.

공원 갈까?”

그렇게 뛰고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다리를 풀고 있는 너에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옆에서 뛰는 너의 얼굴을 살폈다. 이 더운 여름과 달리 너의 얼굴은 청량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한 방울의 땀도 빛이 났다. 미미 너는 정말 달리기를 사랑하는 구나. 내가 지칠 때쯤 맞춰 쉬어주는 너와 풀밭에 앉았다. 그런 나의 옆에서 발목을 돌리는 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발목..아파...?”

.. 내가 발목 관절이 조금 얇은 편이라고 하더라구.. 무리하면 조금 아프더라...”

무리하지마...”

뭐 어때. 설마 뭔 일 생기겠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너.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가 답답했다.

그래도 조심해.. 관절은 한번 상하면 끝이잖아.”

당연하지. 그래도 육상선수로서 발목을 불 싸질러서라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등하고싶어.”

“...”

보라야, 너는 항상 응원해줄 거지.”

“..
당연하지. 나는..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네 편에서 널 응원할거야.”

근데 미미야. 너의 인생에 달리기가 전부는 아니니까. 언젠가.. 네가 달리지 못하는 날이 오더라도 슬퍼하지 말자.”

에이 그런 날이 오겠어?”

네가 풀밭에 드러누웠다. 이미 캄캄해지는 밤하늘은 별이 빛났다. 나도 그 옆에 같이 누웠다. 시끄럽게 울던 매미가 잠잠해진 시점, 아이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보라야

?”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더니 나의 손에 무엇인가 올리는 너. 뭐지... 하고 바라본 손에서 초록색 형체가 내 얼굴로 뛰어올랐다. ..!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바라본 나의 팔에 앉은 그것은 방아깨비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푸하하 웃는 너. 진짜 저 장난꾸러기 어디 안 간다니까. !! 일어나는 나의 모습에 잡을 수 있겠냐며 도망가는 너. 열심히 쫓았지만 발 빠른 너를 잡을 수 없었다. 포기한 채 숨을 고르는 나에게 와서 특유의 얄미운 표정을 짓는 너는 너무 너 그 자체였다.


미미야, 너 내일만 훈련 안 가면 안 돼?”


...?”


나랑 놀러 가자. 나 너랑 워터파크 가고 싶어"


"
갑자기..?"


"
며칠 뒤면 또 보충수업해야하잖아.. 나 주말엔 학원가구.. 내일 뿐이야."


"
그래 뭐 그러자"


"
좋지? 콜 한거다?!"



-

아침 일찍 너를 만나 용인으로 갈 준비를 했다. 오늘 하루를 알차게 너랑 보내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로 너를 보는 마지막 날이니까.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조는 너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 어깨에 기대게 했다. 감은 눈 밑으로 보이는 긴 속눈썹과 높지만 끝이 둥글어 미미스러운 코. 조그마한 머리까지 정말 너는 사랑스러웠다.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돌리려다 그냥 네가 너무 이뻐서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걸려 도착할 때 쯤 잠에서 깬 너는 나의 어깨에 기대었던 것이 미안했는지 작게 미안.. 이라고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
보라야! 내가 이거 챙겨왔다!"

한껏 신난 표정으로 가방을 뒤적인 너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물총이었다. 워터파크까지 갔는데 물총 싸움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웃는 너. 정미미스러운 생각과 행동에 웃음이 났다. 똑같은 걸로 두 개 챙겨왔다며 자랑하는 너의 볼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
미미 잘했어어"


나를 보는 너의 눈이 흔들렸다.


"
... 뭐야.. 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땐 몰랐는데, 너 정말 귀여운 아이였구나.


워터파크에 가자고 제안한 것은 분명 나였는데, 입장하는 순간부터 긴장한 것도 나였다. 나는 정말이지 놀이기구를 못 탔다. 그런 나와 달리 아주 신난 너는 들어서자마자 엄청 무서워 보이는 놀이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
보라야! 사람 없을 때 저것부터 타야 해!!"

신나서 뛰어가는 너에게 끌려서 이것저것 탔다. 젊게 살기 참 힘들다. 영혼은 저기 놀이기구 위에 놔두고 온 것 같았다. 아직 그 영혼이 나에게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차가운 물이 나의 얼굴에 튀었다. 아침부터 애지중지해온 그 물총을 들고 선 네가 나에게 물총 하나를 건넸다. 그 물총을 받자마자 뒤로 세 보 물러서더니, 마구잡이로 물총을 쏘는 너를 쫓아 나도 물총을 쐈다. 빠르게 나에게 물총을 쏘곤 더 빠르게 도망가버리는 너에 나만 쫄딱 물을 맞았다. 정미미 저거 맨날 버블파이터 하더니 완전 파이터 다 됐네. 왠지 분하지만 물총을 쏘며 아니, 내가 맞을 때 마다 행복하게 웃는 너를 보며 그거면 됐지 하고 생각했다. 한바탕 놀이를 끝내고 벤치에 너와 마주 앉았다.


"
정미미.. 너 나 놀리는 낙으로 살지?"

삐진 척을 하며 노려보고 말하는 나에게 너는 양옆으로 입꼬리를 길게 늘려 이쁘게 웃으며 말헀다.

"
아니, 나는 너 얼굴 보는 낙으로 사는데?"

네가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갑작스럽게 진지해진 분위기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를 지긋이 쳐다보는 너를 나도 쳐다보았다. 머리에선 아직 흘러내리지 못한 물이 뚝뚝 떨어졌고, 내 앞에 흠뻑 젖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너는 너무도 이뻤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워 너에게 다가갔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끝까지 느껴졌지만 손에 힘을 주어 너의 볼을 살며시 붙잡았다. 물놀이로 인해 촉촉히 젖은 그 볼을 살며시 당겨 너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나의 뒷목에 손을 넣어 당긴 너는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너의 입술과 나의 입술이 붙었다가 멀어지는 순간 너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
이쁘다"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진심에 당황에 어버버 거리고 있을 때 네가 다시 한 번 나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
네가 더 이뻐 보라야."

그러곤 일어나서 유유히 걷던 네가 뒤돌며 말했다. 보라야 우리 마지막으로 저거 타고 나가자.

 

비교적 유순했던 놀이기구를 마지막으로 워터파크에서 나왔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되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남은 오늘은 총 3시간.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 나를 아는지 나의 손을 그저 조물락 거리는 너. 그런 너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렇게 한 시간 버스를 타며 그저 그렇게 우리는 서울에 도착했다. 벌써 시계의 짧은 바늘이 숫자 10 11의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
미미야, 공원 가자..!"

그런 나의 말을 바로 따르는 너와 또다시 공원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서 바람을 쐬는 너의 얼굴을 보는 데 괜시리 울컥했다. 미미야... 우리 진짜 마지막인 걸까... 너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
미미야.."

"
..?"


"
너는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나랑 함께 할거지...?"


"
? 당연하지"


"
그럼 나도 꼭 너랑 함께할게. 혹여나 미래에 무슨 일이 생겨서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언제나 마음으로 너와 함께할게. 너에게 어떤 일이 생겨도 나는 너를 언제나 믿을게. 응원할게. 너는.. 나한테 전부니까." 

주머니에서 하나 남은 산수유꽃을 꺼내 너에게 건넸다. 그 꽃을 받은 네가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
보라야"

"
산수유 꽃말이 뭔지 알아?"

"
뭔데?"

"
불변이야."

그 순간 산수유꽃이 시들었다. 12시구나. 조급해졌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나는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
..보라야 괜찮아?"

"
할머니..할머니를  찾아야 해!"

나를 잡는 미미의 손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뛰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나보다 빠른 네가 횡단보도 앞쯤에 어느새 나를 따라 잡곤 붙잡아 세웠다.

"
보라야 괜찮아?"

그 손을 뿌리치며 뛰려고 하는데 다시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그대로 쓰러졌다. 그런 나를 잡으려는 너의 뒤로 자동차 한 대가 보였다. 있는 힘껏 너를 밀어냈다.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하얘졌다.



-


"
보라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온통 하얀 하늘. 여기는 어디지? 보라야,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곳에는 나영이가 있었다. 나영이가 말하길 그날 술에 취해서 나간 내가 도로를 건너다가 자동차와 부딪혔다고. 다행히 자동차가 속도를 많이 줄였던 상태라 큰 부상은 없었지만, 그대로 나는 3일째 기절해있었다고. 안 깨어나는 줄 알고 엄청 걱정했다고. 병원에서 여러가지 검사를 마치곤 괜찮지만 당분간 몸을 조심하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과 함께 병원을 나섰다.


"
언제 부산 내려갈 거야?"

"
지금..?"

"
..?"

"
어차피 서울에서 할 것도 없고, 여기 있으려니 마음이 아파."


KTX
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3일 동안 꿈을 꾼 걸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서려 도어락을 열려는데 문 밑에 하얀 종이가 보였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종이를 빼어보니 종이가 아닌 하얀 봉투였다. 집에 들어서 거실에 불을 켜고 밝은 데서 봉투를 뜯었다.


-


보라에게.


안녕? 보라야 
네가 이 편지를 볼 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뒤겠지? 너는 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왔을 테고. 네가 힘들어 할 것 같아서 내가 좀 부탁을 했어. 네가 과거로 왔을 그때, 나도 과거로 왔었거든. 내가 인생의 마지막을 결심하곤 정신이 아득해질때쯤 네가 너무 생각났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더욱이 아득해져 가는 정신에 눈이 감길 때 한 할머니가 보였어. 과거로 가고 싶냐고.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지. 그렇게 너와 함께 3일을 보낼 때 나는 알았어. 너도 나를 보러 미래에서 왔다는 것을.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너무도 조급했다는 것을, 나를 보는 눈에 애틋함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담겨있다는 것이 보였거든. 뭐 그거 아니라도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놀러 가자고 하질 않나 뽀뽀를 하지 않나.. 쨌든 우리는 함께 과거로 돌아와서 3일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거야. 그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나는 죽은 뒤였어. 현재에 했던 선택을 바꿀 순 없으니까.. 그래도 할머니께 부탁을 드렸어. 너에게 편지만 하나 보내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적고 있는 거란다. 보라야, 내가 그때 산수유의 꽃말이 불변이라고 했잖아. 산수유의 꽃말은 변할 수 없는 불변을 뜻하는 게 아니라 불변한 사랑을 뜻하는 거야.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나의 꿈을 열심히 달려서 그 끝에 이미 종착점에 왔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해. 영원한 삶은 없지만 영원히 사랑하고 기억할 수는 있는 거잖아?ㅎ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너를 사랑했어. 과거로 돌아가서 느꼈어. 나는 왜 무엇이 무서워서 그 오랜 시간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못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어. 보라야, 진짜로 사랑해. 나는 나의 꿈의 끝자락에 왔지만 너의 꿈은 아직 기니까 열심히 달렸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나처럼 달리진 말고! 이별은 슬픈 거지만..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힘들 때 내가 보고 싶을 때 하늘을 봐.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하늘은 연결되어있어서 너와 나는 같은 하늘을 보는 거니까. 내가 곧 하늘이기도 하고. 편지가 너무 길어졌네. 보라야, 미안하고 사랑해.

네가 그랬듯 언제나 너를 응원하는 미미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