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ICLES/back

공백의 계절

보라는 편의점의 맞은편 모텔 프론트에 앉아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 애의 이름을 알았다. 정미미. 3학년 1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학교에 와선 매일 잠만 자던 그 애. 야, 쟤네 집 모텔 하잖아. 서로 관계가 비틀어진 양아치로부터 이상할 것도 없는 사실에 관련된 이죽거림을 들으면 고개를 돌려서 그 말의 발원지를 가만히 쳐다보던 그 애. 너희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 너.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갑작스레 표정을 굳히는 얼굴에 대고 조용히 뇌까리던 그 애.


졸업하던 날에도 보라는 식이 끝마쳐진 후 가게 일을 도왔다. 다음에 같이 놀자며 아쉬워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손님들에게 국밥을 날랐다. 작은 식당에는 까만 머리들이 드문드문 채워졌다가 비워졌다. 저녁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마저도 없었다. 달이 머리 위로 떠오를 쯤 식당 앞에 재떨이와 함께 놓인 의자에 앉아 보라는 무채색이 가득 섞여 있는 재떨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타다 남은 찌꺼기, 찌꺼기. 지친 마음으로 내려다본 재떨이와 의자 위에는 각각 담배꽁초와 자신이 앉아 있었다.


신보라?


그리고 보라의 앞에는 정미미가 서 있었다.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골목에서 자라난 미미에게는 익숙했지만 보라에게는 이제서야 적응이 된 냄새였고, 스스로 멀리하는 냄새이기도 했다.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두 손가락으로 들고 미미는 보라에게 물었다.


왜 아직 안 갔어.


보라와 미미는 서로의 가게 안에 앉아서 이따금씩 시선을 주고받았다. 주말 오후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시선은 누군가의 가게에 손님이 찾아오고 나서야 끊겼다. 몸과 입을 각각 다르게 움직이면서도 서로의 머릿속에서는 같은 생각이 떠다녔다. 저 애는 내 동류다, 라고. 하찮은 자신의 인생과 저 아이의 인생이 다를 것이 없다고. 인근 고등학교의 모범생과 문제아가 함께하는, 시답잖고 또 애달픈 생각이었다.


3년간 매일 얼굴을 보면서 그들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생활 패턴을 익혔다.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고 같은 길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일을 한다. 집에 가는 것은 보라뿐이었다. 열 시가 되면 보라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식당 문을 닫고 골목길을 떠났다. 미미는 휴대폰을 하고 있다가도 열 시쯤 되어 앞 식당에서 방울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들고 하얀 얼굴이 가게에서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부분 얼굴이 고단해 보였다. 그래도 열 시가 되면 늘상 집에 갔다. 손님이 가게에 오랫동안 죽치고 있지 않는 이상.


왜 아직 안 갔어. 그렇게 물은 미미가 힐끗 가게 안을 쳐다보았다.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방 안에서만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끔씩 들렸다. 보라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미미의 손에 들려 있는 담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미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눈이 가만히 내리깔려 자신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미미.


.


너는 안 떠날 거지.


어디를.


여기.


미미는 그 하얗고 선이 가는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던지는지 몰랐다. 그냥 긍정해 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응, 하고 낮게 대답했다. 어차피 떠나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미미에게 보라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어 보였다. 미미에게는 처음 보여 주는 웃음이었다.


. 너는 아니야?


그 질문에 보라는 아무런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속으로 이어질 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받자마자 이미 떠오른 대답을 마음 안으로 품고 있다는 것이 언뜻 드러났다. 미미는 상대의 모든 뜻을 알았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뒤돌아 맞은편의 건물로 향하다가 걸음을 멈춰 서서 보라를 불렀다.


신보라.


아,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였다. 여전히 작고 낡은 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내 버린 듯 기대 있는 보라를 향해 미미는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길게 숨을 내빼며 입을 닫았다. 더 큰 짐을 그 작은 어깨에 올려 두기 싫은 탓이 컸다. 아니야.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미미의 뒷모습과 그 잔상을 보라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해 3월의 어느 추적거리는 오후, 여전히 휴대폰을 향해 의미 없는 손가락 짓을 몇 번 하던 미미는 울면서 걸어 들어온 낯익은 얼굴을 마주한다. 비에 흠뻑 젖은 몸과 비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끈적거림으로 젖은 얼굴은 미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약하게 이야기하며 미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는 알고 있었지?


어떤 소용돌이가 그 표정 너머에서 휘돌고 있는지 미미는 차마 가늠할 수도 없었다. 긁히듯 나는 그 목소리에 미미는 두어 번 작게 숨을 쉬다가 어깨에 닿아 있는 손을 잡았다. 축축해진 손이 남방을 젖어 들게 하고 있었다. 미미의 손에 닿는 체온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 차가웠다.


그래서 그날 나를 그렇게 불렀고, 할 말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봤고. 그냥 말을 해주지 그랬어. 무슨 대응이라도 했을 텐데, 그랬으면….


어깨에 닿는 악력이 약해지며 점점 낮아지는 보라의 자세에 미미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프론트 밖으로 나왔다. 쓰러지듯 미미에게 안기는 몸은 차가웠던 손과는 달리 타는 듯 뜨거웠다. 미미는 그게 꼭 꺼져 가는 불길 속 남아 있던 재의 온기같이 느껴졌다. 가만히 보라를 안고 있던 미미는 가까운 방의 키를 아무렇게나 잡아 문을 열었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보라를 눕히자 하얀 시트가 가만가만 젖어든다. 긴 손가락들이 눈 위에 얹혀져 심연 같던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씻고 이따가 나와. 한숨 자고 나와도 좋고.


키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방 번호를 힐끗 확인한 미미가 말했다. 온도를 조금 높여 줄까 싶어 난방 캡을 여는 미미에게 보라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평소처럼 무신경하게 흘려보냈다면 듣지 못했을 목소리였다.


가지 마.


온도를 높이는 버튼을 누르려 뻗어지던 손가락이 일순간 멈췄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건 보라의 눈이 가려져 있지만 않았다면 미미가 말을 들었다는 걸 알기에 충분했다. 미미는 난방 캡을 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방을 나갔다. 보라는 눈 위에 이제는 미적지근해진 체온을 올려놓은 채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모르는 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보라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은 미미의 부모님이 소유하는, 건물의 1층에 속해 있었다. 졸업식 날 보라는 어머니로부터 당신의 혈압 수치가 너무 높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미미는 어머니로부터 모텔 맞은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줄 거라는 말을 흘리듯 들었다. 아, 그래? 하며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미미가 골목길로 들어섰을 때 보라가 그 모텔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엄마가 다시는 못 일어나셨어.


날이 어둑해져 모텔을 찾는 손님들이 점점 많아지던 시간대였다. 목덜미에 수건을 감고 미미의 옆에 놓여 있던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낸 보라는 불을 붙이며 한숨을 쉬듯 얘기했다. 보라의 옷에선 눅눅한 냄새가 났다. 프론트 뒤에 있는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보라는 따끔거리는 이물감을 목 너머로 넘기며 낡은 벽에 자신을 기댔다. 세상에 기댈 공간이 그거 하나뿐이었던 것처럼.


아침 되면 갈게.


비어 있는 콜라 캔 안에 반도 피우지 못한 담배를 넣고는 벽에 기대 눈을 감으며 보라가 한 말이었다.


상 치르고 앉아 있는데 떠오르는 게 네 얼굴뿐이더라. 웃기지. 친하지도 않은 네 얼굴이 왜, 하필, 그때.


원망스러웠나 봐. 네 잘못 없는 거 알아.


미미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뒤를 돌아 보라를 확인했다. 불편한 자세, 금방 아래로 꺼져 버릴 것만 같은 마른 몸. 의자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괴고 머리끝에서부터 하나씩 훑었다. 그리고는 방 안에서 들은 목소리처럼 나직하게, 보라가 평소와 다르게 무신경했다면 듣지 못했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신보라.


.


잠긴 목소리로 보라가 대답했다. 입술을 보던 순간부터 미묘하게 달라진 불규칙한 숨소리로 미미는 보라가 깨어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원망스러워?


뭐가.


내가.


쌍꺼풀이 짙게 배인 눈으로 미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던 보라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망스럽지. 너도, 네 부모님도, 우리 엄마도, 하다못해 이 계절도. 다들 봄이라면서 뭔가 새로 시작하는데 나는 원점보다도 더 뒤로 밀려났거든. 아무것도 없이.


미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보라와 눈만 맞추고 있었다. 서로의 눈빛에서 곧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피로, 권태, 자조, 열일곱에 처음 눈이 마주치던 순간부터 끈질기게 둘을 쫓아온 동질감 같은 것들을 미미와 보라는 시선으로 나눴다. 미미는 금방이라도 안에 있는 것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에 대고 충동적으로 얘기했다.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있을게.


?


봄마다 네 곁에 내가 있겠다고.


언젠가부터 스스로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던 말. 어쩌면 봄뿐이 아니라 모든 계절이길 바라기도 했다. 충동적이었던 그 말은 보라에게 가 닿을 때쯤엔 전부터 준비해 오던 말이었던 것처럼 바뀌어 있었다. 표정을 굳힌 채 미미의 눈동자 너머를 건너다보던 보라가 한 말은 어쩌면 확신에 더 가까웠다.


약속해?


약속해.


새벽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텔을 나서던 보라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가는 목소리에 발걸음이 잡혔다. 돌아본 곳에는 미미가 있었다. 분명 자는 것을 확인하고 담요까지 덮어 주고 나왔는데도 옅은 온기가 사라진 것을 느낀 것인지. 보라는 미미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갈 데 있어?


보라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낡은 전세 아파트를 떠올렸다. 계약 기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보라의 눈에 잠깐 동안 스친 고민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미미는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툭 내뱉었다.


어제 지낸 데서 지내든지. 며칠이라도 좋으니까.


그렇게 보라는 매일 미미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해가 뜨면 학교에 갔다. 해가 지면 얼떨결에 일하게 된 모텔 맞은편의 편의점에서 일했다. 달이 뜨고 머리 위로 올라오면 편의점 유니폼을 벗어 두고 모텔로 들어섰다. 프론트에 앉아 있는 미미는 담배를 태울 때도 있었고,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도 있었으며, 가끔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또 가끔은 담배와 다른 두 가지 중 하나를 같이 하고 있었지만, 보라는 몰랐다. 자정이 가까워 오면 편의점 방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미의 시선이 자꾸만 편의점 문에 가 닿았다가 다시 돌려진다는 것을.


왔어.


다정하지도 않은 두 글자를 인사처럼 받게 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던 보라가 힐끗 눈만 맞추고 다시 노트북으로 무신경하게 시선을 돌리는 미미에게 건넨 말이 발단이었다.


인사라도 해 줘. 곁에 있겠다며.


그에 다시금 시선을 돌려 보라를 눈에 담는 미미에 보라는 엷은 미소를 입매에 띄웠다.


이제 조금 같이 있는 것 같네.


보라가 자신의 방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미미의 눈은 다시 노트북 속 영화로 돌려졌지만 머릿속에선 같이 있는 것 같네, 하는 그 입매가 반복해서 떠오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아니라, 자신을 갉아먹는 웃음이 아니라, 손님에게 기계적으로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안심시켜 주는 그런 웃음. 미미는 문득 보라가 3월의 이전보다 행복해질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왔어.


그래서 그다음 날 미미는 평소처럼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보라에게 짧은 말을 건넸다. 상대를 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도록 그 눈을 직시하면서. 보라는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을 띄웠다가 전날과 같은 미소로 응, 하고 대답하고선 빨아들여 지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뒷모습이 위태로웠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골목길을 힐끗 확인한 미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두드렸다. 방 안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신보라.


가는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불렀다. 방문이 열렸지만 미미는 선뜻 문을 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열려 있는 방문 틈새에선 우울이 기어나와 미미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 문 너머에는 눈가가 발개진 채 미미를 바라보고 있는 보라가 있었다.


왜 울어.


다정할 것도 없는 그 목소리는 미미의 어깨에 기대 오는 보라에 의해 먹히듯 사라졌다.


그냥 나 좀 안아 줘.


그건 구조 신호와도 같았다. 미미는 보라가 난파된 시점이 지난 3월인지, 열일곱인지, 더 이전인지 잠깐 동안 곱씹어 생각했다. 차라리 3월이기를 바랐다. 더 이상 심해 속으로 가라앉는 일 없이 자신이 구조해 줄 수 있도록. 미미가 손을 뻗어 등을 가만히 끌어안자 그제서야 목에 감겨 오는 두 팔에 미미는 온기를 느꼈다. 누군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따뜻함과 그 누군가에게서 기어나오는 불행함이 자신을 감쌌다. 피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너는 왜 나랑 있겠다고 하는 거야.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보라가 물었다.


죄책감 때문에?


전부터 생각해 오던 물음인 듯했다. 어딘가 모르게 오래 담아 온 듯한 향이 났다. 하얗고 사그락거리는 손을 혼자 매만지며 그렇게 묻는 보라를 향해 미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을 찾았다. 낯선 느낌이었다. 말을 듣는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며 말을 한다는 것은.


아니.


그럼.


그냥 두면 신경 쓰여.


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보라가 웃었다. 실소에 가까웠다.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묻은 목소리로 보라가 중얼거렸다.


물가에 내놓은 애 같다는 거지, 지금.


딱히 대답을 바라고 꺼낸 말 같지는 않았다. 미미는 보라의 말을 잠깐 생각했다.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들을 볼 때와는 다르게 그날의 기분을 신경 쓰게 되고, 건물로 들어서는 표정을 신경 쓰게 되고, 자신에게 건네지는 말을 신경 쓰게 되고, 그런 것이었는데. 미미는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게 3월부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쩌면 보라를 처음 보던 열일곱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너는 나랑 동류야. 그렇지.


보라는 자신과 미미가 동류라고 생각했지만,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침대 헤드에 나란히 기대앉아 있다가 점점 자세가 낮아지는 보라를 보며 미미는 주머니 속에 있던 담뱃갑을 찾았다. 뭘 찾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보라는 여기서 피우지는 마, 하고 중얼거렸다.


미미는 보라가 처음 담배를 피우던 모습을 떠올렸다. 물이 수건에 배어드는 젖은 머리와 비 냄새가 나는 눅눅한 옷, 축축하게 젖어 있던 눈매,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는 붉은 입술이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미미는 왜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 가라앉은 공기를 뚫고 낮은 목소리가 미미의 귀에 닿았다.


산책 나갈래?


오후 동안 발만 까닥이며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를 쳐다보고 있던 미미의 앞에 보라가 나타나선 한 말이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보라에 미미는 반사적으로 너 학교는, 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보라가 해의 색이 붉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골목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미미는 모르지 않았다.

그냥 나왔어. 나오고 싶어서.


미미는 평소의 우울 같은 건 비쳐지지도 않는 그 낯빛을 보면서 겉옷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스트잇에 밥 먹고 옵니다. 하는 글씨를 휘갈겨 쓴 채였다. 봄의 해를 마주하면서 보라와 함께하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게 아무런 부정 없이 일어선 이유 중 제일 큰 것이었다.


어디 먼 곳이라도 나갈 것 같던 보라는 모텔이 있는 골목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 공원으로 들어서더니 한적한 곳의 벤치에 자리 잡고 깊숙하게 몸을 기댔다. 햇빛으로 얇게 뜨고 있는 미미의 눈을 보라는 힐끗 쳐다보고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탄산음료를 한 모금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도망가고 싶었어. 공기가 너무 갑갑하더라.


어디로부터. 미미는 보라가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알고 싶었지만, 보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사 온 수입 맥주 캔을 한참 동안 바르작대며 가만히 보라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지친 목소리에 가져다 대기에 무슨 말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공기가 둘 사이에서 잠자코 흘렀다. 해가 서로의 얼굴에 닿았지만 그건 딱히 어떤 생각을 환기시켜 주지 못한 채 둘의 머릿속에서만 여러 생각들이 엉겼다.


미미는 그날의 산책이 어떤 전조 현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마주하는 얼굴에서 미미는 잠깐이라도 무언가를 읽어 내려 노력했지만, 보라는 미미가 그럴수록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미미와 자신의 주변에 대해 자주 반추했다.


보라가 미미를 떠올릴 때면 그 머릿속에선 첫인상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3학년 1년 동안 같은 반이었고, 학교에 와선 매일 잠만 자던 그 애.


보라는 자신을 둘러싼 불행이 싫었다. 적어도 어릴 때는 행복이 함께했던 것도 같은데 자라날수록 그건 자꾸 자신을 비껴 지나갔다. 아버지를 잃고 열일곱이 되어 추레한 골목길로 들어서던 때 그 생각을 처음 했고, 모든 것을 잃고 비 오는 봄의 회색 거리로 나섰을 때 그 생각을 다시, 그리고 제일 강렬하게 했다. 우산도 없이 아스팔트 길을 걸으면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시선이 맞을 때마다 네 삶이 나와 같구나, 하는 말을 서로 주고받게 되던 얼굴.


처음엔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그 눈이 싫었다. 동류라는 생각은 처음 들었었다. 처음이 그 눈에게 돌아가던 것이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자꾸만 맞았고, 자신의 시선에 자신의 의지가 들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학년이 된 첫날 교실에 앉아 있었을 때도 교실로 들어서던 미미와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건 보라였다. 찰나의 순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서 불행을 읽었다. 미미가 고개를 돌리고서 보라는 맥빠진 표정으로 웃었다. 얽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에.


보라는 자신을 둘러싼 불행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착한 곳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어두운 골목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모텔로 돌아왔던 그 추적거리는 3월의 어느 새벽에 보라는 골목길을 떠나려고 했다. 어디로 가든 그 길이 없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도 조금은 밝지 않겠냐고 생각하면서. 떠나는 보라를 얽혀 버린 자신의 동류가 잡았다. 왜 자신의 모텔에서 지내라는 그 눈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보라는 모른다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미 이유를 알았다. 학교로 떠나는 길에,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안에 다잡은 마음이 왔어, 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자꾸 흔들렸다.


반추하는 동안, 그리고 막바지에 그 사고를 장식하는 건 지금 미미가 지니는 위치였다. 그걸 무시한다는 건 보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힘들어할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안아 주는 그 애. 교대 시간이 다 돼서 편의점에 들어와 소주 두 병을 사 가던 그 애. 몇 번 보지 못한 중년의 남성이 프론트에 앉아 있는 걸 의아해하면서 방문을 열었을 때 침대에 앉아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그 애.


취기로 붉어진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눈물만 흘리던 자신에게 키스하던 그 애.


왜 나랑 있겠다고 하는 거야.


네가 좋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로 대답하던 그 애.


나 도망치고 싶어.


보라는 지난밤 자신이 술에 취해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했다. 살결이 닿는 게 좋아서 몇 차례 입술을 붙이고 혀를 섞다가 침대 위에 누운 채 자신을 올려다보던 미미의 목에 입술을 대고 한 말이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들면 미미의 표정이 보였을 것이었지만 보라는 부러 얼굴을 들지 않았다. 두려웠다. 잠깐 멈췄던 입술이 다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보라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손가락을 끼워넣던 미미가 보라의 머리를 껴안았다.


그럼 가야지.


너는.


난 못 가.


?


약속했잖아.


보라는 졸업식 날 미미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너는 안 떠날 거지, 하는 의미 없는 물음에 분명한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하던 대화. 짧은 대화였지만 여전히 미미의 머릿속에는 깊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른 약속은?


봄이 끝나 가잖아.


다음 봄은?


다음 봄엔 네가 와 줘.


네 말처럼 난 안 떠날 거니까. 미미는 울지 않았다. 보라는 스스로 눈물을 견디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미는 가끔 그 생각을 틀렸다고 몸소 입증해 주곤 했다. 몸을 겹친 채로 미미의 오른쪽 어깨가 젖어 들었다. 미미는 다정스레 그 뒤통수를 쓸어 주지도 않았고, 다시 입을 맞춰 주지도 않았지만 보라는 맞닿아 있는 체온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위안과 위로 같은 것들, 느껴 본 지 오래되어 마주칠 때마다 자꾸 응어리들이 스스로 풀어 헤쳐지는 감정들이었다.



미미는 모텔 맞은편 편의점에서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서 있는 그 애의 이름을 몰랐다. 입고 있는 옷의 소매가 짧아지던 때부터 일하기 시작한 여자애였다.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로 힐끗 그 얼굴을 쳐다본 미미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치 없었다.


익숙함이 사라진 뒤부터 미미의 계절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봄과, 봄이 아닌 계절. 공백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