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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계절 中 봄


 

link>>사계절 中 겨울





1.



보라와 헤어진 다음 날, 문자가 한 통 날아왔다.


‘귀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 문자를 가만히 내려보는데 그 생각만 계속 맴돌았다. 왜 이제야, 왜 지금. 그렇게 기다렸던 소식이었는데. 미미는 몸을 한껏 움츠렸다. 전날 밤, 눈가가 짓무르게 울던 보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가루가 되어 날아갈 듯 바스락거리던 보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한동안 미미의 악몽이 되었다.




2.



“미미씨, 이거 복사 좀 부탁해요.”



정신없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에 매달렸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한 후로 악몽을 꾸는 일이 줄었기 때문이다.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로 몸도, 마음도 지쳐갔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밤마다 우는 보라를 보는 것보다는.


선배가 맡긴 종이뭉치를 복사기에 넣고 그 앞에 멍하게 서서 복사기가 뱉어내는 종이들을 멍하게 쳐다봤다. 얼마 전 보라와의 관계를 유일하게 알던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다.

‘너네 헤어졌어?’

회사에서 야근 중에 앉아 모니터 구석에 뜨는 PC 카톡 알림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다. 크게 내쉬는 숨이 파르르 떨렸다. 응. 그렇게 됐어. 짧은 답장에 바로 답장이 따라붙는다.

‘어쩌다’

고개를 푹 숙였다. 어쩌다. 그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미미는 입술 끝을 물었다가 복사가 완료됐음을 알리는 소리에 몸을 굽혔다. 목 끝까지 올라온 감정을 다시 꾹 누른다.



“미미씨, 그때 말한 소개팅은 어떻게 됐어?”

“계속 연락은 하고 있어요.”

“그래? 걔 어때? 괜찮지?”



점심시간 맞은편에 앉아 젓가락을 든 채 신이 난 사수가 전에 소개해준 남자에 대해 떠드는 것에 미미는 예의 섞인 웃음만 내비쳤다. 회사에 입사하고 줄곧 이어지는 소개팅을 미미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짧은 몇 번의 만남과 연락이 끝이었다. 많아야 두 번. 결국, 상대에게 미안하다, 사과하고 연락을 끊었다.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가던 사수는 미미가 원하던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이내 다른 말로 돌린다. 밥알을 세어가며 먹던 미미는 사무실 서랍에 소화제가 남아 있었는지 떠올렸다.

미미는 곧잘 체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 날이면, 보라는 미미의 옆에 앉아 엄지와 검지 사이를 온종일 주물러 주었다. 잔뜩 내려간 눈썹 끝과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던 얇은 손가락. 미련하게 거기서 그걸 다 먹고 있어요. 하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괜찮냐고 물어오던 낮은 목소리.

미미는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며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눌렀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3.



“술 끊었다니까.”

“진짠 줄 몰랐지.”



난감하다는 듯 웃는 얼굴에 미미는 제 앞에 놓인 물잔에 차가운 물을 채웠다. 진짜 끊었어. 소주를 마시듯 한입에 아까의 물을 털어 넣으니 친구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신의 술잔을 채웠다. 자꾸 보자고 닦달하는 친구에 마지못해 나온 자리였다.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보니 과거의 일이 떠올라 미미는 다시 물잔에 물을 채워 마셨다. 친구는 평소와 같이 제 상사 욕과 일상을 이야기했다. 묻고 싶은 말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인데 일부러 그 주제를 피해서 돌고 도는 텅 빈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미미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매를 먼저 맞는 건 미련한 짓이다.



“진짜 술 입도 안된다, 너?”

“실수하기 싫어.”

“왜. 보라한테 술 마시고 전화하기라도 했어?”



훅 들어오는 질문에 물을 마시려 잔을 들었던 미미의 몸이 멈칫했다. 들어 올린 잔 너머로 친구의 얼굴을 보면 친구는 얄밉게 웃고 있다. 너무 뜬금없었니? 미안하다는 기색 하나 없는 얼굴이 익숙해 미미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하지만 친구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는 그것이 대답인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고불고 매달렸어?”



친구는 덤덤했다. 보라와 사귀는 내내 보라가 아깝다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했던 친구였다. 잘 하라고, 그런 애 만나기 쉽지 않다고 언제나 채찍질을 하던. 그러지 못했다. 그러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한참 동안 미미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친구는 재촉하지 않았다. 각자의 잔을 채우고, 비우고. 그 행동만 반복했다.



“나쁘다고 했어.”

“뭐?”

“보라한테 너 진짜 나쁘다고 그랬어.”



미미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오늘 오랜만에 악몽을 꿀 것 같다.





-



입사하고 첫 회식이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굽고, 기민하게 선배들과 상사들을 맞추느라 진이 빠지기도 했고, 신입이라고 주는 술을 다 받아먹다 보니 평소의 주량을 넘어서 버렸다. 바짝 긴장했던 정신이 선배가 등을 밀어 태워준 택시에서 풀어졌다. 술을 마시면 으레 그러하듯 보라의 집에 갔다. 그리고 거기 있는 작은 냉장고에서 보라가 제티를 꺼내 따서 주면 그걸 들고 홀짝홀짝 마시며 보라의 잔소리를 들었다.

‘아가씨 다 왔어.’

택시 기사님의 말에 잔뜩 꼬인 혀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비틀거리며 바로 선 미미는 익숙한 건물에 아… 하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었다고 하는데, 나는 누구의 목을 베면 되는 걸까. 아무렇지 않게 보라의 집 주소를 부른 내 혀를 잘라야 하는 걸까. 미미는 아직 까맣게 꺼져 있는 보라의 집 창문을 가만히 올려 보다가 몸을 돌렸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비죽 나오려 했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보라가. 그래서 전화를 했다. 보라한테. 헤어지고 처음으로. 길게 이어졌던 통화음 끝에 자다가 일어난 것인지 가라앉아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보라가 전화를 받았다.



“왜 그래써?”

“……. 술 마셨어요?”

“왜 그랬냐고! 왜… 왜 말하지 않았어? 왜 혼자 앓아놓고 나한테…. 나한테 왜 그렇게 말했어?”

“….선배 많이 취했어요. 주변에 다른 사람 없어요?”

“왜 날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왜!!”



비명 같은 외침이 그 작은 골목 안을 가득 메웠다. 전화기를 든 미미도, 수화기 속 보라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미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왜…. 사실 미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보라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할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척 보라에게 믿음을 강요한 것도, 보라를 방치한 것도 그래서 우리의 헤어짐의 원인이 나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내가 나쁜 거였다.


그날 밤 꿈에 또 보라가 나왔다. 흰 눈이 내리던 날, 울며 좋아해서 힘들다며 무너지던 네가 또.

악몽이다.

잠에서 깨어나 보면 그 꿈을 꾼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땀과 눈물로 젖은 베개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술을 끊었다.



-



미미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으며 비웠던 자신의 잔을 채웠다. 진짜 너 술 먹지 마라. 비난이 가득한 얼굴에 미미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빈 물잔을 손에 든 채 빙글빙글 돌리던 미미는 카톡, 하고 울리는 알림음에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 눈웃음이 들어간 카톡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한 번 더 카톡하고 울린다. 오늘 회사 선배가 보여준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미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토독토독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전송된 카톡에 떠 있던 1은 금방 없어졌다. 미미는 그것을 보고도 매너모드로 바꾼 핸드폰을 테이블에 뒤집어 올려놨다. 친구는 눈짓으로 미미의 행동을 쫓더니 미미의 손이 핸드폰에서 떨어지자마자 물었다.



“누구야?”

“소개받은 사람.”

“저번 주에 만난 사람?”

“아니. 오늘 새로 소개받았어.”



미미의 대답에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여러 번 연이어 울렸다. 하지만 미미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안주들 몇 개를 주워 먹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뭘.”

“내가 소개팅하는 거에 대해서 말이야.”

“말하면 들을 분도 아니시고, 다 큰 어른한테 뭘 뭐라고 해.”



언뜻 들으면 차가울 법한 친구의 말이 참 친구다워 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짓이란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또 훅 들어오는 친구의 말에 미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웃었다. 친구는 남은 소주를 제 잔에 한 번에 붓더니 찰랑찰랑 넘치려 하는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미미는 핸드폰을 뒤집어 잔뜩 쌓여 있는 알림으로 소개팅 상대방이 보낸 카톡을 읽었다. 그래, 참 쓸데없는 짓이지. 중얼거린 미미는 다시 핸드폰을 뒤집었다.




4.



“이번 주 주말에 벚꽃이 핀다는데 공원 갈까요?”



맞은편 남자의 말에 미미는 그렇게 해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째 소개팅이었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들을 잠깐 떠올려 보려 하던 미미는 맞은편에서 미미씨? 하고 부르는 소리에 습관적인 웃음을 내비쳤다. 하얀 얼굴에 쳐진 눈꼬리. 말을 할 때면 빤히 쳐다보는 고동색 눈동자. 많은 부분 겹치는 얼굴에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좋은 사람이다. 저런 얼굴을 한 사람들은 다 착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정했고, 잘 웃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오래 만나지 못할 것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여지없이, 악몽을 꿨다.


남자와 헤어진 미미는 뚜벅뚜벅 걸었다. 얼마 전만 해도 살을 베어낼 듯 불던 바람도, 꽃이 피는 걸 시샘하듯 몰아치던 추위도 많이 누그러졌다. 어느새 정말 봄이 되었다. 나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괜찮아져 있을까. 이대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다 보면 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한참을 걷다 다리가 아파 근처 버스정류장에 앉은 미미는 저린 종아리를 작은 손으로 주물렀다.

언니 발 진짜 작아. 내 손바닥에 다 들어오지 않을까요?

환청처럼 보라의 목소리가 들려 미미는 눈을 감았다. 구두를 신은 날이면 보라는 종종 자신의 무릎에 제 발을 올려놓고 주물러 주곤 했다. 작은 손만큼 작은 발을 보라는 언제나 신기해했다. 종종 간지러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보라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간지러워요? 하면서 일부러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눈을 뜨고 굽혔던 몸을 세운 미미는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뱉었다. 꽉 막힌 것 같은 숨에 연신 크게 몇 번 호흡을 뱉어내 보지만 답답한 속이 풀리지 않아 툭툭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괜찮아질 수 있을까. 미미는 눈을 감은 채 입술 끝을 물었다. 툭툭, 여전히 속이 답답했다.




5.



“매년 벚꽃이 한창일 때 비가 와서 아쉬웠는데 올해는 비가 안 와서 다행이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옆에 나란히 서서 걷는 남자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그 얼굴을 힐끔 보다가 저런 것마저 보라를 닮았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알고 보니 어릴 때 잃어버린 오빠였다거나 그런 게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가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실웃음이 나왔다. 남자의 말처럼 매년 벚꽃이 피고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와선 꽃구경을 가기도 전에 꽃잎이 다 떨어지게 만들더니 올해는 화창한 날씨가 연신 이어지고 있다.



“미미씨 사진 찍을까요?”



대답하기도 전에 셀카 모드로 바꾼 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에 미미는 거절하지 못하고 한 발짝 뒤에서 가볍게 웃었다. 하나, 둘, 셋, 찰칵- 남자의 목소리와 셔터 소리에 맞춰 웃으며 가만히 있던 미미는 남자가 핸드폰을 내리자 시선을 돌려 하얗게 핀 벚꽃을 올려봤다. 벚꽃이 필 때쯤이면 중간고사 기간이라 이렇다 할 꽃놀이를 가지 못하고 학교 내에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했다. 떨어진 벚꽃 가지를 귀에 꽂은 채 가만히 서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고 서서 또 수십 분 동안 사진을 골랐다. 네가 잘 나왔네, 언니가 잘 나왔네 싸우다 겨우 고른 사진으로 카톡 프로필 사진을 하기도 했다.



“사진 잘 나왔어요. 사진 보내드릴게요.”

“네.”

“저기…. 사진이 진짜 잘 나왔는데, 프로필 사진으로 해도 될까요?”



머뭇거리며 묻는 남자의 말에 미미의 얼굴이 굳었다. 기대에 찬 얼굴에 미미는 어떻게 거절의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미미선배!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제 이름에 미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대학교 후배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스크를 쓴 채 곧은 눈으로 쳐다보는 보라도 있었다. 아는 분들이에요? 옆에 선 남자가 미미를 쳐다보며 물었다. 보라의 시선이 떨어진다.



-



후배들과는 대충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보라는 처음 시선을 준 이후로 끝까지 말 한마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주변의 보라 동기들이 눈치를 줬지만 보라는 마스크와 모자로 더욱 얼굴을 가린 채 미동이 없었다. 어디 아픈 걸까. 답답한 걸 싫어하는 보라는 미세먼지 경보가 뜨는 날에도 그냥 나오는 날이 많아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울상을 하며 마스크를 썼다. 살이 많이 빠진 건지 더욱 얇아진 몸도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미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남자의 목소리에 그제야 아직 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미미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남자는 미미씨, 하고 다시 불렀다. 미미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티 나지 않게 잠깐 눈을 찌푸렸다.



“우리… 진지하게 만나 볼래요?”

“미안해요.”



단번에 나오는 거절의 말에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미안해요, 다시 한번 나오는 사과의 말에 남자는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친구가 들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쁜 년.



-



악몽을 꿨다. 오늘은 하얀 눈이 아닌 하얀 벚꽃에 파묻혀 우는 보라가 나왔다. 흰 꽃들이 내리는 곳에 주저앉은 보라는 두 눈이 무르게 울었다. 꽃들은 점점 쌓여서 금방이라도 보라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미미는 처음으로 꿈속의 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에서 깬 미미는 멍하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손을 내밀고 그 손을 보고 보라가 저를 올려 보는 것에서 꿈이 끝났다. 미미는 침대 맡에 충전 중이던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삭제를 했지만, 여전히 외우고 있는 보라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처음이었다. 꿈속에서 보라의 얼굴을 본 것은. 꿈에서의 보라는 언제나 두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참을 수 없었다. 당장 목소리라도 들어야 내가 살 것 같았다.



“여보세요.”



긴 수화음 끝에 잠에서 깨 가라앉은 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미는 전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크게 숨을 뱉어냈다. 미미가 전화한 것을 알면서도 보라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미미도 한참 동안 말없이 보라의 숨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보라였다.



“술 마셨어요?”

“보고 싶어, 보라야.”



참아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달음박질치듯 보고 싶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보라의 숨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 보라야. 다시 한번 말하니 울음을 참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언니 진짜 나쁜 거 알아요?”



욕지거리해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보라는 너무 착했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하는 말이 겨우 저거였다.



“응. 알아.”



우는 보라의 목소리에 비교해 미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왜…. 왜 정리될 것 같으면 사람을 흔들어요…”

“보라야.”



처음 미미의 목소리가 떨렸다. 보라는 조용히 미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미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아 미미는 무릎을 끌어안으며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힘을 줬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앞으로 잘하겠다는 말도, 달라지겠다는 말도 너에게 준 아픔을, 불안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입만 달싹거렸다.



“나 아파요. 열도 나고, 목도 아프고.”

“지금 갈게.”



결국, 붙잡아준 것은 보라였다. 겉옷을 챙기면서도 미미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보라도 끊지 않고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려줬다.


너 코도 막힌 것 같은데….

응. 목감기, 콧물감기 같이 온 것 같아요.

집에 약 있어?

아뇨. 다 먹었어.

알았어. 덥다고 전기장판 온도 낮추지 말고 누워 있어.

응. 알았어요.

금방 갈게.

응. 빨리 와요.


미미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응. 빨리 갈게. 그 말을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딱 맞춰 눈물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살 것 같다. 미미는 드디어 편안히 쉬어지는 숨에 눈물을 훔치며 보라에게로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