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도 까먹는 기억력인지라 11년 만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라해서 딱히 큰 감흥 같은 건 없었다. 굳이 집까지 찾아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건네는 동네 어른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미나에게 남아있는 이곳에서의 기억은 흐릿하고 짧은 장면 한 조각이 전부다. 상가의 큰 벚꽃나무에 꽃이 만개한 이삿날이었다.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떠나는 미나보다 더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에게 어줍잖은 약속을 했었다.
벚꽃이 피면 꼭 너를 생각할게. 벚꽃이 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그게 너라고 생각하고 절대 밟지 않을게. 진짜 진짜 꼭 그럴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막 뱉은 그 어린 약속은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며 아이의 얼굴도 이름도 흐릿해져 갔지만 벚꽃이 흐드러진 시기가 오면 그 약속만은 꼭 생각이 났다. 어릴 적엔 이건 누구니까 절대 밟으면 안 된다고 하며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실수로 밟기라도 한 날엔 바닥에 대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눈물 콧물을 뽑아댔다. 조금 크고 나서는 하얗게 뒤덮인 꽃잎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떠올랐다. 아 어떤 친구랑 그런 약속을 했었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왜 했을까. 생각하며 발에 채이는 꽃잎을 밀어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다 어느 순간부터는 벚꽃이 잔뜩 떨어져 있는 곳이 보이면 일부러 찾아가 가만히 꾹 한 번 밟아보곤 했다. 다시 만날 거란 기대도 없고 상대의 얼굴도 이름도 흐려져버린 이미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약속이지만 그냥 순수하고 귀여운 어린 스스로를 조금 더 기억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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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반 교실이 오늘따라 시끌벅적하다. 어디서 또 새로운 소식을 물고 왔는지 세정이 우리 반에 제주도 애가 전학 온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돌아다닌다. 덕분에 아침 자습 시간엔 노상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책장만 넘기던 아이들도 덩달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무슨 사정이 있기에 고2에 전학을 오는지, 공부는 잘 하는지, 이름이 뭔지, 예쁜지 간만에 생긴 흥미로운 얘깃거리에 이런저런 소문과 추측들을 늘어놓으며 정신없이 떠들기 바쁘다.
"오늘 우리 반 왜 이렇게 시끄럽지?"
한창 웅성거리고 있는 6반 교실의 문이 쿵 열리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담임 뒤에 있는 낯선 사람에게로 향했다.
"쌤 진짜 전학생 온 거예요?"
"벌써 어디 소문났니? 어 전학생 왔어. 미나야 문 닫고 얼른 들어와."
잔뜩 긴장해서 바닥만 보고 있던 미나가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심호흡을 살짝 하고 교실로 들어섰다. 선생님이 먼저 소개를 하는 동안 빈자리도 찾아볼 겸 슬쩍 교실을 둘러본다. 눈치를 보며 쭉 살피는데 맨 뒷자리에 앉은 아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다른 아이들의 그저 호기심 어린 시선과 달리 어째선지 미간을 찌푸리고 미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진한 인상에, 처음 보는 사람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고, 심지어 맨 뒷자리고. 이래저래 괜히 잔뜩 쫀 미나가 서둘러 먼저 시선을 피한다. 속으로 제발 저 옆자리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본인이 자기소개 하기."
"아, 네. 어… 안녕? 내 이름은 강미나고 제주도에서 전학 왔고… 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열심히 침착한 척 노력하며 인사를 했지만 동글동글한 얼굴이며 뿅 튀어나온 귀며 모두 이미 한참 전부터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들이 단체로 입을 틀어막고 쟤 너무 귀여운 거 아니냐며 또 한 번 쑥덕거린다.
"그래서, 우리 미나가 어디에 앉으면 좋을까요."
귀여운 새 친구를 옆자리에 앉히고 싶은 아이들이 손을 들까 말까 움찔거리는 사이에 맨 뒤에 조용히 앉아있던 혜연이 재빠르게 손을 들고 선생님을 불렀다. 쌤 여기 빈 자리 있는데요~. 타이밍을 놓친 아이들과 꼼짝없이 맨 뒷자리 무서운 아이 옆에 가게 생긴 미나의 탄식 소리가 조용히 교실에 퍼졌다.
"오 딱 좋네. 미나 저기 손든 애 옆에 가서 앉아."
어떻게 싫다고 항의도 못 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미나가 쭈뼛쭈뼛 발걸음을 옮긴다. 왜 하필 저 자리가 비어있지. 아 집에 가고 싶다. 속으로 계속 웅얼거리며 자리에 도착하자 혜연이 씩 웃으며 야 야 빨리 앉아봐 하고 책상을 팡팡 두드린다. 아까까진 노려보더니 지금은 또 왜 저렇게 신난 건가 싶어 그저 무섭기만 하다.
"자 이제 나는 할 일 끝. 쌤 간다. 몇 분 안 남았지만 남은 시간 알차게 자습하시고, 우리 6반 오늘도 화이팅. 반장 책임지고 전학생 잘 챙겨."
담임 선생님마저 떠나자 그나마 조용히 있으려고 노력하던 아이들의 입이 한순간 왁 터져버린다. 적극적인 몇 명이 미나와 혜연의 자리 근처로 다가오려는 조짐이 보이자 혜연이 이번에는 책상을 크게 내려치며 교실을 조용히 시켰다.
"야 너네들 앉아. 아직 자습시간이야."
아 몇 분 남았다고. 짜증 내는 미미에게 입 모양으로 닥치라고 말하고는 다시 시선을 미나에게로 돌린다. 미나는 금세 돌아온 뜨거운 시선에 다시 긴장을 해 옆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교복 주머니만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준비한 건 해야지. 큰 결심을 한 미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머니 가득 챙겨 온 새콤달콤 중 하나를 혜연에게 건넸다.
"저기, 이거 먹을래?"
"오 새콤달콤? 너 설마 첫날이라고 준비해온 거야?"
"으응… 왜? 너 안 좋아해…?"
"아니! 나 새콤달콤 완전 좋아하는데! 그냥 이런 거 준비해온 게 귀여워서. 고마워 잘 먹을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미나가 당황한 듯 되묻자 혜연이 서둘러 변명하곤 새콤달콤을 받아든다. 곧바로 하나 까서 입에 쏙 넣고는 맛있다고 말하며 미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다. 흔히 말하곤 하는 웃으니까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처럼 이렇게 와닿기는 또 처음이었다. 첫인상과 너무도 다른 말랑한 웃는 얼굴에 지레 겁먹었던 게 우스울 만큼 내내 붙잡고 있던 경계가 한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저기, 너 이름이 뭐야?"
"나는 조혜연. 너는 강미나 맞지?"
선생님이 몇 번이나 말했으니 알겠거니 싶어 고개를 끄덕인다. 너 예전에 여기 살았었지? 아까 자기소개 할 때 이 얘기를 했었나? 아무튼 맞으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더 신이 난 혜연이 이번엔 너 나 기억나? 라고 물으며 눈을 반짝였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대답을 못 하고 잠시 고민하던 미나가 이번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진짜 모르겠어?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더 말이 없다. 내내 뜨겁던 시선이 갑자기 거둬진 게 신경 쓰여 슬쩍 옆자리를 살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밝게 웃던 혜연이 지금은 입술을 쭉 내밀고 새콤달콤 껍질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잘 풀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다시 불편해진 분위기에 뭐라도 할 말을 찾으려고 눈만 도로록 굴리는데 쉬는 시간 종이 친다. 뭘 할 틈도 없이 미나의 주변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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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1교시 시작종이 치고 나서야 겨우 미나를 놓아주었다. 그 짧은 몇 분 새 새콤달콤으로 빵빵하던 주머니는 홀가분해졌고 미나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우리 반 애들 좀 유난스럽지."
책상 위로 쓰러진 미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혜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반 친구들에게 휘둘리는 와중에도 괜히 미안하고 찝찝한 기분에 계속 혜연이 신경 쓰였는데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인다.
"그래도 애들이 좋아서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다행이고. 1교시 영어야."
여전히 서운함이 묻어나는 표정과 말투였지만 그래도 제 나름 신경 써주는 게 느껴져 다행히 새로운 곳에서의 첫 인간관계를 아주 망쳐버린 건 아니었구나 싶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뒤늦게서야 혜연이 했던 질문에 대한 호기심이 고개를 든다.
"반장! 인사!"
아까 했던 말이 무슨 얘긴지 물어보려는데 영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반장을 부르는 소리에 옆자리에 앉은 혜연이 일어난다. 선생님한테 인사하는 혜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미나가 이래서 엄마가 첫인상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한 거구나 하며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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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너 기억하냐고 한 거 무슨 말이야?'
이따 꼭 물어봐야지 다짐하고 수업 내내 속으로 연습도 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자꾸 세정이랑 미미가 찾아와서 계속 타이밍을 놓쳤다. 점심시간에도 어김없이 미나의 팔을 잡아끄는 둘에게 잡혀 급식실로 매점으로 쫓아다니기 바빴다. 종일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덕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야 오늘 혜연과 다시 얘기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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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덜 풀린 긴장 탓인지 조금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더니 미나가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생각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교실 열쇠를 어디에 두는지 전날 확인해둘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세상 조용한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다행히 교실에 도착해보니 자물쇠가 이미 열려있어 누가 올 때까지 밖에서 종종거리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기 자리에서 체육복을 베고 자고있는 혜연이 보였다. 곤히 잠든 짝꿍을 깨우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자리로 가 앉은 미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자고 있는 혜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어떻게 알던 사이인지 물어보기 전에 스스로 먼저 기억해내면 좋지 않을까 싶었다.
전날 느꼈던 것처럼 여전히 무서울 만큼 예쁘고 이목구비가 짙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웃지 않아도 은근 말랑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 건가. 이제 보니 코에 점이 있고, 웃을 때 이쯤에 보조개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정작 당장 궁금한 예전 기억들은 떠오르지도 않는데 눈앞의 얼굴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다 하나둘 새로운 기억으로 새겨져 간다. 자꾸 생각이 흐트러진다 싶더니 혜연을 살피던 시선이 유독 붉은 입술 위에서 한참을 맴돌고 있다. 순간 돌아온 정신과 함께 창피함도 딸려와 괜히 아니 뭐 바른 건가 싶어서 하고 작게 소리내어 변명을 해본다. 다시 집중해서 좋지도 않은 기억력을 열심히 뒤져가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혜연도 미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흡 깜짝이야… 언제, 언제 일어났어? 어… 안녕?”
“응 안녕. 방금 눈 떴는데 니가 너무 집중하고 있길래 방해 안 하려고 얌전히 있었지. 뭐 하고 있었어?”
“어? 별로? 아무것도? 그냥 일찍 나왔더니 아직 잠이 덜 깨가지구. 어, 그래가지고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 그, 응, 그냥.”
“그르냐. 아으 나도 지금 너무 피곤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솔직하게 니 얼굴 보며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고 말을 하자니 어째 좀 변태 같기도 하고 영 아닌 거 같아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했는데 용케 대화가 넘어간다. 혜연이 불타고 있는 미나의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해주는 건지도 모르고 미나는 위기를 잘 넘긴 스스로가 좀 기특했다.
“아 맞다. 어제…”
지금이 마침 타이밍이다 싶어 어제 일을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핸드폰이 쑥 들어온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액정 안의 사진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혜연이 턱을 치켜들고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맞지? 이거 너 맞지?”
“…어?”
정신을 붙잡고 다시 사진을 보니 화면 속 아이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기는 하다.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펼쳐봤던 옛날 앨범 속의 5살 미나가 그 모습 그대로 혜연의 폰 안에서 빵싯 웃고 있었다.
“헐 그러게. 진짜 나네.”
“그리고 여기 옆에 같이 있는 애기는 조혜연이야. 이제 뭐가 좀 떠올라?”
확실히 사진 속에는 5살의 미나와 함께 누가 봐도 어린 혜연임이 분명한 아이가 있었다. 근데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그 어린 시절까지 기억력이 미치지를 않는다. 이렇게 사진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이 텅 빈 느낌이다. 미나가 또다시 혜연이 실망할까 봐 솔직하게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혜연이 푸흐흐 하고 웃었다.
“야 기억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왜 울상을 짓고 그래.”
“미안해서…”
“엥? 아니 미안할 일 아닌데. 솔직히 내가 미안해야지. 어제 괜히 혼자 삐져선 반장이란게 너 챙겨주지도 않고… 아휴. 솔직히 일곱 살 이전 일을 기억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아 그래도…”
“됐어됐어. 아무튼 내가 너 기억하니까 됐지 뭐. 야아 나 어제 앨범 뒤지느라 한숨도 못 잤더니 진짜 죽을 거 같아.”
혜연이 계속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나의 어깨를 괜찮다는 의미로 툭툭치고는 다시 체육복 위로 드러눕는다. 옷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을 조용하던 혜연이 이내 고개를 돌려 미나를 올려다본다. 내가 오늘부터 옛날얘기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 다 말해줄게. 잠시 입을 다물고 머뭇거리다 다시 눈을 맞춰오며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다른 애들 말고 나랑 밥 먹어. 알았지? 단호한 눈빛과 달리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뱉은 건지 뻣뻣하고 어색한 말투에 이제서야 웃음이 나온다. 미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하자 혜연이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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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급식은 혜연이랑 둘이 먹어도 괜찮겠냐는 말을 꺼내자마자 우리가 어제 뭐 잘못한 게 있냐고 세정이랑 미미가 매달려온다. 귀여운 전학생을 포기해야만 하는 두 사람에 하루아침에 혜연이한테 버림받게 생긴 나영이까지 합세해 절대 못 놓아준다고 질척대기에 그냥 다섯이서 같이 먹기로 했다. 아무튼 바라던 대로 둘이 같이 다니게 됐으니 적당히 잘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머지 셋이 매점으로 뛰어가는 동안 미나와 혜연은 둘만 뒤로 처져서 슬쩍 운동장으로 빠져나왔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을 벗어나 단둘이 있으니 고작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 뿐인데도 솔직히 훨씬 편안하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이지만 그때 지낸 시간이 있어 그런가 그 짧은 새에 서로가 많이 편해졌구나 싶었다.
스탠드에 앉아서 햇볕을 쬐다 미나가 혜연에게 아침에 제대로 못 본 사진을 다시 보여달라고 졸랐다. 티비를 보는 동글동글한 두 개의 뒤통수 사진,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춤추고 있는 사진, 눈밭에 드러누워 함께 웃고 있는 사진… 몇 장 되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있다. 여전히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사진을 보고 혜연의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릿속에 그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쉬운 건 혜연이 찍어온 사진이 몇 장 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너랑 있는 사진 다 찍어오고 싶었는데 졸면서 했더니 이것밖에 없어…”
“오늘만 날인가 뭐. 나중에 더 보여주면 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나의 손가락은 더 넘어가지 않는 화면을 아쉬운 듯 계속 밀어대고 있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혜연에게 폰을 돌려주며 다음엔 자기도 몇 장 찍어오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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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에 택배로 부쳤던 이삿짐 몇 개가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미나는 곧장 박스를 뒤져 앨범들만 골라 마구잡이로 꺼냈다. 분실된 건 아닐까 내내 불안했는데 다행히 다들 멀쩡하다. 그중에 가장 두껍고 오래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책장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어차피 중학교 입학 이전의 사진은 이 앨범 안에 다 있다.
“엄마 나 여기 떠난 게 7살이랬지?”
엄마가 응 그렇지 하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랑 연락이 닿았다며 들떠서 통화 중이었다. 미나는 앨범에 적힌 년도를 확인하며 조금 더 과거로 휙휙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어떻게 얘를 바로 못 알아봤을까 싶다. 물론 지금과 똑같이 생긴 것도 그 이유지만 동네를 떠나기 전 사진 대부분이 혜연과 함께한 것들이라 놀라울 정도였다. 월요일에 학교 가면 알려줘야겠다 생각하고 사진을 폰으로 찍고 있는데 때마침 혜연이한테서 카톡이 온다.
◁ 강미나뭐햄?
◁ 너 혹시 내일 시간 있어??
◁ 할 거 없으면 내일 나랑 놀아줄래???
◁ 같이 시험공부 할까?
◁ 아무튼 나랑 놀자ㅠㅜㅜㅠㅠㅠ…
대답할 틈도 없이 몰아치는 카톡이 언제 멈추나 지켜보던 미나가 혜연이 조용해진 틈을 타 답장을 보냈다.
내일 무슨 일 있어? ▷
◁ 아닝….
◁ 그건 아닌디……….
뭐야 ㅋㅋ 아 벌써 내가 보고 싶은 거야? 그런 거야? 그래그래 알았어 그럼 언니가 특별히 내일 놀아줄게 ㅎㅎ ▷
잠시 망설이던 미나가 씩 웃으며 장난스러운 답장을 써 내려 갔다. 반응을 기대하며 기다리는데 이미 읽었으면서 한참을 답이 없다. 채팅창을 올렸다 내렸다도 해보고 잠깐 트위터 확인도 하고 왔는데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내가 뭘 잘못 보냈나 싶은 미나가 전에 보낸 내용을 몇 번 소리 내어 읽어본다. 별문제 없잖아 투덜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채팅창을 불만스럽게 툭툭 치고 있으니 이것저것 아무 창이 떴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의미 없는 손장난을 계속하는데 화면 위로 영상통화 창이 뜬다. 뭘 잘못 눌렀나 싶어 황급히 확인해보니 다행히 혜연의 쪽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서둘러 거울을 보며 얼굴을 정리했다.
“…여보세요?”
“강미나!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니가 갑자기 거니까 그렇지!”
“아니이 보고 싶냐고 물으니까 진짜 보고 싶잖아. 그래가지구.”
혜연이 헤헤 웃으며 대답한다. 두 눈을 접어가며 말랑하게 웃는 저 얼굴에 또다시 미나의 마음이 순식간에 다 녹아내린다. 답장이 늦은 것도 뜬금없이 영상통화를 건 것도 그 모든 것들을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린 미나가 왜 이렇게 늦게 답했냐고 괜히 투정을 부렸다.
“얼굴이 말이 아니라서 정돈 좀 한다는 게 너무 오래 걸렸어. 진짜 미안해…”
“자기만! 나도 정돈 좀 하게 미리 말 좀 해주지.”
“에이 괜찮아. 너 지금 완전 예뻐.”
애써 가라앉혔던 미나의 입꼬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훅 치솟는다. 참 낯간지러운 말로 능글맞게 잘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다. 미나가 웃으니까 마음이 놓이는지 혜연도 더 크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내일 뭐 하자고?”
“그래 맞아! 우리 내일 뭐 할까?”
애초에 혜연에게 무슨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닌지라 둘이서 한참을 의논하다 그냥 만나서 같이 시험공부나 하기로 했다. 약속 장소랑 시간까지 다 정해서 더 할 말도 없는데 차마 끊지는 못하고 얘기를 질질 끌고 끌었다. 결국 혜연이 내일을 위해서 어서 자라는 인사를 하고 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통화시간을 알려주는 화면이 깜빡이다 사라지자 아까 막 건들 때 눌러진건지 혜연의 카톡 프로필이 보인다. 아쉬운 마음에 화면에 눈을 못 떼던 미나가 자연스럽게 프사를 한 번 눌러본다. 변화에 둔한 성격이라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미나와 혜연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 언제부터 해둔 걸까 생각하다 미나도 혜연을 따라 조금 전에 찍어둔 옛날 사진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으로 프로필 사진을 변경해본다. 뿌듯하게 바뀐 프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자기가 오버한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혜연이 기분 나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누가 보기 전에 프로필을 다시 기본으로 변경하려고 허둥대는데 타이밍 좋게 카톡 알림음이 울린다.
◁ 오오 야 너 프사 뭐얗ㅎㅎㅎㅎ
◁ 쟤네 누구길래 저렇게 귀엽지 진짜???
◁ ㅋㅋㅋㅋ 잘쟈~~ 내일 보쟈~~♥
너두. 두 글자를 보내고 폰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치워버린다. 너무 빨리 들켜버린 것 같아 부끄러운 맘에 침대로 뛰어들어 베개를 마구 잡아 뜯었다. 그래도 따라 했다고 싫어하는 거 같진 않아 다행이네. 겨우 진정된 미나가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얼굴을 차가운 베개 위로 던진다. 터질 것 같던 얼굴이 천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오늘처럼 조혜연에게 신경을 쏟고 나면 자꾸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이상하고 간지러운 열도 이렇게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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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집 몇 권과 필기구를 넣어둔 가방에 옛날 앨범까지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어제 통화 중에 어디서 공부할지 한 시간 동안 얘기한 결과 장소는 혜연의 집으로 결정됐다. 지난 몇 일간 같이 등하교를 한 덕에 혜연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단지 앞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혜연이 미나를 부르며 뛰어온다. 매번 교복 입은 모습만 보다가 오늘처럼 자기 스타일로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잠깐 마실 거 사 오느라고.”
“아니야 방금 왔어. 왜 힘들게 뛰고 그래.”
“너 기다릴까 봐… 안 기다렸음 다행이구. 자자 얼른 올라가자.”
혜연이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바닥에 놓인 미나의 백팩을 챙겨 든다. 짐이 많아서 무거우니까 본인이 들겠다는 미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꿋꿋이 자기가 매고 걸어간다.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뿌듯한 얼굴을 한 혜연이 귀여워서 그냥 내버려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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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하겠다는 계획은 현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혜연네 엄마가 거실에 계시길래 인사를 드리고 재빠르게 방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옆에 익숙한 사람이 한 명 더 앉아있었다.
“…엄마?”
“딸? 뭐야 너 왜 여깄어?”
너무 놀라서 혜연이를 쳐다보자 미나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 미나가 엄마에게 얼마 전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던 친구가 혜연이 엄마였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에 둘이 그렇게 붙어 다녔으면 엄마들끼리 친구가 아닐 리가 없겠구나 싶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앨범 몇 권이 펼쳐져 있다. 혜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엄마들 곁으로 간다. 옛날 사진 같이 봐도 되냐고 물으니 당연히 좋단다. 자연스레 혜연의 옆자리에 앉은 미나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자기가 챙겨온 앨범도 꺼내 든다. 앨범 통째로 챙겨온 거 너무 귀여운 거 아니냐며 나머지 세 사람이 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두 사람의 앨범에 다 같거나 비슷한 사진만 있을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아예 다른 사진들이 생각보다 많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하도 붙어 다녀서 사진 양이 감당이 안 된 후부터 각자 본인이 찍은 사진들만 보관한 거란다. 자기 앨범만 볼 때는 생각나지 않던 게 미나의 앨범을 보니 또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혜연이 한 장 한 장 짚어가며 그때 있었던 일들을 종알종알 얘기해준다.
“이건 어디서 타임캡슐 얘기 주워듣고 와서는 우리끼리 타임캡슐 묻은 날이네.”
“뭐 우리 타임캡슐도 있어? 어디에 묻었는데?”
“아 그게 묻긴 묻었는데… 둘이서 놀이터 쓰레기 다섯 개씩 주워와서 묻은 거라 그거 다시 찾지도 못하고 찾아도 못 써…”
어떻게 저런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나 신기해하자 자기도 신기하다며 웃는다. 미나가 보고 있던 혜연의 두꺼운 앨범이 어느덧 거의 끝나가고 넘겨진 페이지에는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더는 없었다. 다시 페이지를 되돌려 둘이 함께 있는 7살 마지막 봄날의 페이지로 돌아왔다.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아까 놓친 사진이 한 장 있었다. 옆에 큰 트럭이 있는 걸 보니 이사 가기 직전에 찍은 사진 같았다.
“전에 이 사진은 왜 안 찍어왔어? 너 완전 귀여운데.”
“뭐? 아… 야 이게 뭐가 귀여워… 콧물 범벅 돼가지구… 아 못생겼어.”
“에이 귀엽기만 하구만.”
사진 속엔 울음을 꾹 참느라 눈코귀 모두 빨개진 채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미나와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서러운 눈물을 주룩 흘리며 눈도 제대로 못 뜬 혜연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미나의 앨범에는 없는 사진이다. 마지막 날 혜연이네 엄마가 찍은 거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근데 너 이날 왜 이렇게 많이 울었냐. 뭐야뭐야 언니 떠나는 게 그렇게 슬펐어 우리 혜연이? 옆에서 쪽팔려 하는 혜연을 신나게 놀리며 사진 속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척 콕콕 두들기는데 문득 두 아이의 뒤에 있는 배경이 눈에 훅 들어온다. 익숙한 큰 나무가 보였다.
"…아 상가 벚꽃나무."
불현듯 떠오른 장면에 미나가 읊조렸다. 스스로가 뱉은 말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사진 속의 모든 것들이 희뿌옇던 지난 기억 속 장면들 위로 겹쳐진다. 어린 약속을 뱉던 흐릿한 영상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이제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상대가 누군지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조혜연이었다.
"혜연아 너 이날도 기억해?"
"너 이사가는 날? 어… 헉 이건 잘 기억이 안 난다. 엄청 운 것만 생각나는데.”
지금까지 어린 시절의 작은 부분 하나까지 다 기억해내던 혜연이 이날 있었던 자기의 낯간지러운 멘트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미나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내심 기뻤다. 하나라도 자기가 혜연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 고작 하나의 기억이 떠오른 주제에 서프라이즈 선물을 숨기고 있는 아이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얘기해줘야 하나 고민하다 엄마들에게 마지막 이삿날에 대해 물으며 물꼬를 터볼까 했다. 어느 순간부터 둘이서만 따로 대화 중인 엄마들 쪽을 돌아보니 둘만의 추억을 떠올리느라 미나와 혜연은 관심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뭘 물어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우리 잠깐 나갈래? 뻘쭘하게 눈치만 보며 앉아있는 미나의 귀에 다가온 혜연이 속닥인다. 응 그러자 몸을 티 안 나게 살짝 빼고 괜히 귀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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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지?”
그 공간에 계속 있기 뻘쭘해 밖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울상이 된 혜연이 미나를 바라본다. 아까 본 사진이 떠올랐다. 벚꽃이 보고 싶었다. 상가 벚꽃나무는 이미 제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마침 딱 좋은 다른 장소를 알고 있었다.
“우리 벚꽃 보러 갈래? 당장 멀리는 못가지만 동네 산책로 거기 벚꽃 꽤 예쁘게 폈던데.”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본 게 전부인 산책로는 멀리서 볼 때보다 안으로 들어와서 보는 게 훨씬 더 아름다웠다. 풍성하고 예쁜 꽃나무들이 촘촘히 길을 따라 줄지어져 있어 어디를 보아도 벚꽃이 가득하다. 계획 없이 나온 거라 날씨 확인도 제대로 못 했는데 마침 간만에 보는 파란 하늘까지 완벽하게 좋은 때였다. 처음엔 뜬금없이 무슨 꽃구경이냐던 혜연도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풍경에 저가 제일 신이 나선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팔랑팔랑 뛰어다닌다. 하얗고 분홍빛의 꽃바람 속에 섞여 있는 그 모습이 같은 색의 필터를 입힌 것처럼 꽤나 잘 어울리는 게 7살의 강미나가 그냥 눈앞의 아무거나에 막 약속을 한 건 아니었나 싶었다.
“야 진짜 이쁘다. 솔직히 꽃구경 왜 가는지 이해 못 했는데 지금 조금 알 거 같아. 나 지금 완전 행복해졌어.”
근처 편의점에서 주전부리를 사 들고 돌아와 가까운 벤치에 앉아 신나서 떠드는 혜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쁜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들떠있는 혜연의 반짝거리는 눈빛도 담았다. 꽃놀이의 즐거움을 알려줘서 고맙다며 예쁘게 웃는 혜연이에게 얼른 내 기억 속에 항상 니가 있었다 말해주고 싶어 넌지시 질문 하나를 툭 던져본다.
“너는 벚꽃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그냥… 예쁘다?”
“나는 벚꽃만 보면 매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이사 가는 날이었는데 걔가 너무 우는 거야. 자기 잊지 말라고 꼭 다시 놀러 오라고. 그래서 달래줘야겠다 하는 마음에 벚꽃 보면 너라고 생각하겠다고 절대절대 안 밟을 거라고 약속했거든. 사실 계속 그 약속만 기억했지 그 아이가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났는데…”
“근데 그게 나였어?”
“응 맞아 너였어. 아까 사진 딱 보는데 바로 떠오르더라. 왜 진작 생각 못 했지? 지금 와서 보면 너였을 게 당연한데.”
“어 잠시만. 강미나 너 그러면 지금 나 밟고 있는 거야? 헐 대박 완전 실망이야.”
“…아 장난치지마.”
“아야! 미나 언니 혜요니 아포요. 아야야 밟지 마세요.”
미나는 계속 기억에 머물러 있던 약속을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심지어 당사자에게 이야기하는 거라 잔뜩 설레고 진지한 상태인데 혜연은 자꾸 얄밉게 웃으며 장난을 친다. 괜스레 섭섭해져서 살짝 째려봐줬다. 문득 혜연의 얼굴에 평소보다 다섯 배는 더 환한 웃음이 걸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빨갛게 상기된 두 볼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보조개가 눈에 들어온다. 미나가 저를 계속 기억해왔다는 것이 기쁘다고 온 얼굴로 티를 내고 있다. 말도 안 되게 귀여운 모습에 서운한 마음은 금세 가시고 혜연을 따라 푸흐흐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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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바닥을 제 꽃잎으로 뒤덮는 벚꽃에 약속을 한 탓에 그 약속은 어쩌다 꽤 오래 기억에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그 약속의 주인공이 조혜연이라니. 지금껏 많은 봄을 지나며 매번 그 약속을 떠올려왔다. 그럼에도 큰 의미를 둔 적이 딱히 없었는데, 18살의 봄에 조혜연을 다시 만나고부터 지난 세월의 어떤 기억들과 어떤 행동들이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로가 어릴 적에 같이 어울리던 사이였다는 것이, 이렇게 같은 반 친구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혜연이 한눈에 미나를 알아본 것이, 미나가 의식도 못 한 채 내내 혜연을 기억해왔다는 것이. 그리고 결국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 모든 이야기들이 향하는 곳이 모두 너라서 참 다행이야, 미나의 입가에 여러 말이 맴돈다. 모든 게 다 너를 다시 만나려고 그랬나 봐, 그런 간지러운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새삼 운명 같은 지금까지의 상황에 눈앞의 예쁜 풍경에 적당히 좋은 날씨까지 더해져 서로를 만나고 내내 간지럽던 마음의 틈새에서 이전보다 더 분명한 이름을 가진 꽃이 피어났다. 아슬하게 맞닿아 어색하게 멈춰 있는 두 사람의 손 위로 벚꽃잎이 날아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