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riag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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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을 했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는데,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것 말곤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상심한 얼굴이었지만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엄마가 왔다. 아빠의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시아버지가 되실 분의 전화는 받았다. 그냥, 조금 지쳤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는 말과 함께 쉬고 싶단 말을 전했다. 엄마는 내 손을 한 번 잡아주곤 병실을 나갔다. 몸이 아팠다. 그리고 링거 한 대를 맞은 뒤에 퇴원을 했다. 요 며칠 간의 일들이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아이가 생기고 난 걸 알았을 때, 그와 헤어질 생각과 결혼을 하는 생각을 놓고 고민을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고민한 뒤 내가 선택한 건 후자였다. 임신 7주 차라는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아주 기뻐했다. 행복하게 살자고 너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양가 가족들에게 알린 뒤 자기가 사는 집으로 들어오란 얘기를 했다. 지금 당장 식을 올리긴 어렵지만 최대한 빨리 준비해보자며 결의에 찬 그의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착잡하기도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양가에 임신 사실을 알리고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곧 시아버지가 될 사장님은 신 대리를 예전부터 참 좋게 봤는데 우리 집 며느리가 될 줄은 몰랐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시어머니가 되실 분은 참 예쁜 며느리를 얻었다며 내 어깨를 감싸 안으셨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결혼 얘기를 듣더니 술을 사 왔다. 엄마는 아빠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에게 한 잔을 따라줄 때 본인은 두 잔을 마셨다. 그렇게 몇 병을 마셨을까, 아빠는 결국 눈물을 보였고 그는 아빠 앞에서 정말로 꼭 따님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같이 또 울었다. 지켜보던 엄마도 눈물을 훔쳤다. 나만 안 울었다. 그냥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의 부모는 웃었지만 우리 부모는 울었다. 저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차라리 어디 가서 우리 첫째는 부잣집에 시집을 간다는 지극히 천박하고 속물 같은 얘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그럴 사람들이 아닌 걸 알아서 더욱더 그런 생각을 했다.
양가에 임신과 결혼을 알린 뒤 얼마 되지 않아 자취방을 처분하고 그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떨어져 있기 싫다고 하루라도 더 같이 있자고 채근하던 그의 뜻에 따랐다. 그는 지금 사는 오피스텔을 처분하고 아파트를 얻을 거라고 했다. 돈을 좀 더 얹어주더라도 빨리 집을 얻겠다는 그의 말에 그러지 말라고,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했다. 우리 천천히 하자고, 시간은 많다는 내 말에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당장 필요한 건 집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이미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건 집이 아니지만 나에게 당장 필요한 건 무엇이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건 무엇일까.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변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나와 내 부모님, 그리고 태어날 아이에게 잘할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내 친구들도 하나같이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랬다. 그래서 그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약속대로 지금처럼 변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행복이라 믿고 살기로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더 지냈고 그 기간 동안 그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계약했으며 수리가 끝나는 대로 이사를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식은 아이를 낳은 뒤에 올릴 예정이었다. 그는 서두르더라도 올해가 가기 전에 올리고 싶어 했고 양가에서도 그러길 원했지만 나는 좀 따뜻한 봄이나 시원한 가을에 하고 싶다고 했다. 집에선 아이가 태어나면 식을 올리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냥 내가 싫다고 했다. 결혼을 하는 사람은 나라며 짜증을 내고 나서야 다들 그만했다. 또한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당장엔 식을 못 올리니 혼인신고라도 할까 싶었지만 식을 올릴 때 즈음에 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에 미뤄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을 그만뒀다. 내 퇴사의 이유에 대해선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다는 얘길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 추측들은 다 틀렸는데, 나는 예비시댁에서 일을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둔 것도 아니었고 사장의 며느리가 될 예정이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과 어색해져서 그만둔 것도 아니었다. 정말 휴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유뿐이었다. 스물한 살 때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어쩌면 임신과 결혼은 나름대로 내세우기 적당한 핑곗거리였다. 그렇게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아 불완전한 휴식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뒤늦게 아빠에게 수술은 잘 끝났고 집에 왔다고 했다. 그 이후론 핸드폰을 끄고 잠을 잤다. 새벽에 절로 눈이 떠졌지만 그간 많이 잤으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그는 혼자 있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틈만 나면 전화를 했다. 그게 더 귀찮다는 걸 왜 모를까 싶다가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이러는 거겠지 싶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하려다 그것 또한 그의 행복이라고 생각해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 마음 또한 성치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명확하게는 몰랐다. 나는 혼자 집에서 밥을 먹다가도 울었고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다가도 울었다. 그리고 그가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괜찮은 척을 했다. 그 또한 애써 밝은 척을 했지만 꽤나 마음고생이 심한지 얼굴이 꺼칠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몸은 괜찮아졌고 일상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집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거나 가끔씩은 근처의 카페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게 전부였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아이는 또 가지면 된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위로를 했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결혼을 진행하길 권유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고, 조만간 그와 나의 결혼은 진행될 것이다. 사실 안 할 이유가 없는 결혼이었다. 그가 좋은 배경만 가진 사람이었다면 나는 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정하고 소탈하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열렬한 구애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배경이 아주 큰 장점인 것도 맞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살 수 없었을 거란 걸 너무나 잘 알았다. 게걸스럽게 그의 배경을 탐하진 않았지만 그걸 무시할 수 있는 사람도 못 됐다. 사랑만 좇아가기엔 나는 나이를 먹었고 사실 이젠 좇아갈 사랑조차 없었다. 20대 초중반엔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결혼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때에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한다는 그 말을 이해하게 됐다. 나는 단지 내게 주어진 몇 개의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제일 괜찮은 선택을 한 것뿐이었고 그 선택에 사랑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어쨌든 내 선택은 남들이 보기엔 꽤 괜찮았던 모양인지 그간 타인에게 받았던 부러움과는 또 다른 부러운 시선을 받았으며 그 부러움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 것들은 온전히 내가 주체가 아닌 채로 받는 부러움은 그 전에 받던 부러움이 가져다주던 은근한 기쁨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했기에 사실 전혀 유쾌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굳이 그런 것들에 일일이 반응할 필요가 없을 만큼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의 시기 어린 말과는 다르게 시부모가 될 분들은 나에게 못되게 굴거나 우리 집이 그의 집만큼 넉넉하지 않다고 해서 무시를 하는 일도 없었으며 내가 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수모를 주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부족한 게 없냐며 부담스러울 만큼 더 챙겨주려고 할 정도로 괜찮은 것만 가득했으니까. 하지만 너무 넘친 게 문제였을까, 계속 마음 한구석이 공허했다. 그러나 공허함을 표현하는 것조차 공허해서 괜찮은 척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의 내 상태를 얘기할 수도 없었다. 어디든 좀 털어놓는다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들 복에 겨운 소리를 한다고 할 게 뻔했다. 고민 끝에 그나마 가장 믿는 친구에게 요즘 좀 우울하단 얘기를 꺼낸 결과 메리지 블루가 아닐까? 하는 얘길 들었다. 메리지 블루? 유산 이후의 메리지 블루라니 조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결혼 전은 맞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을 앞둔 지금 꽤나 달라진 게 많은 것도 사실이었고 여기서 오는 혼란이나 막연한 불안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썩 개운치는 않았지만 계속 지내다 보면 이 감정도 사라지겠지 싶은 마음에 그냥 메리지 블루 정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메리지 블루는 가벼이 넘기기엔 꽤나 버거운 것이었는지 내 삶에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는데, 요근래 계속 잠을 설쳤다. 한때 누군갈 기다리며 새벽잠을 억지로 참았던 적 이후로 이렇게 새벽에 잠을 못 자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잠에 들 법하면 자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어릴 때의 일들이 꿈에 나오기도 했고 예전에 좋았던 기억들도 나왔으며 가끔은 초현실적인 꿈이나 악몽을 꾸기도 했다. 그리고 때론 악몽보다 더 힘든 꿈을 꾸기도 했다. 나는 그 꿈을 어지러운 꿈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가장 자주 꾸는 꿈이었고, 그 내용은 전부 다 한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었다. 나는 그 꿈을 꾸는 게 너무 싫어서 잠이 쏟아지는데도 새벽까지 억지로 참다가 잠드는 날이 지속됐다. 나는 원래 특히 더 잠이 많은 사람이라 수면 패턴이 한 번 망가지기 시작하니 아주 예민해졌다. 그러나 다정하지만 섬세하지는 못했던 그는 요즘 내가 예민해진 건 알았어도 내가 잠을 설치는 것까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드는 사람이라 내가 아무리 옆에서 뒤척여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 상태를 굳이 알리는 것도 싫었고 이걸 알아봐 주는 것도 싫었다. 그에게 내가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걸 알리게 된다면 다정한 그는 자신이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는 걸 자책하면서 걱정이 쌓인 목소리로 병원을 가길 권유하고 때론 같이 가기도 할 게 분명했다. 싫었다. 그래서 잠시 집을 떠나있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부천 집에 다시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부모님에게 지금의 내 상태를 얘기하기도 싫었고 다른 말로 둘러댄다고 해도 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떤 식으로든 엄마를 귀찮게 만들 일인 것 같았다. 또한 나까지 귀찮아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냥, 잠시 여행을 가면 어떨까 싶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지금의 삶에서 변화를 좀 주는 게 좋겠단 생각을 했다. 어디가 좋을까, 따뜻하고 활기찬 곳은 싫었다. 춥고 또 추운 곳으로 가고 싶었다. 추운 걸 너무나 싫어하지만 때론 이렇게 스스로 찾아가고 싶을 때도 있나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여행의 행선지를 결정하지 못할 때 몇 년 전 새벽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일출을 보러 갔을 때가 꿈에 나왔다. 그 역시 내가 어지러운 꿈이라고 명명한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새벽 기차를 타고 싶어졌다. 오히려 피하는 것보단 정말 한 번 그 꿈속의 장소들에 다녀오는 게 낫지 않을까, 피하지만 말고 진짜 가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생각을 정리할 요량으로 한 번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당장 떠나려고 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말을 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와 다툼을 벌이기도 싫었고 그의 성격상 내가 말없이 사라진다면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떨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원래 여행에 있어선 고집스러울 정도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중요시 여겼지만 이번만큼은 아닌 것으로도 어딘가 싶었다. 행선지와 떠나는 시간 말고는 생각해본 건 없었다. 그저 떠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여행 얘기를 했을 때 그는 당연히 같이 함께 따뜻한 열대의 섬으로 가자고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꽤나 당황했고 안 된다는 말을 했다. 내가 있는데 왜 혼자 여행을 가냐며 이해할 수 없다고 하다가도 지금은 날이 추우니 따뜻해지면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나도 이번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혼자 다닐 기회가 계속 없을 거 같다고, 절대로 걱정할 일 없게 연락도 계속하겠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그는 내가 혼자 여행을 가도록 허락했다. 허락, 허락했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이 없을까. 내 스스로도 그를 설득하고 허락을 받았단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싫었다. 나는 내 의견을 관철시켰다, 라고 생각하려다 왜 굳이 내 의견을 타인에게 관철시켜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는 내가 가는 날까지도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날이 추워서 아직은 쉬어야 할 때라며 나를 말렸다. 이 추운 날,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왜 강원도에 가냐며 그러지 말고 나랑 따뜻한 곳에 가자고 했지만 그건 내가 돌아오고 난 뒤에 가자고 했다. 정 그러면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부탁하는데 떼를 쓰는 것 같아 별로였다. 결국 그는 입이 비죽 나온 채로 청량리까지 차를 태워주겠다고, 이것만이라도 하고 싶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플랫폼까지 따라와서는 잘 갔다 오라고 감기 들어서 오면 안 된다고 머플러를 고쳐 매주는 그에게 잘 다녀오겠단 인사를 했다. 그리고 기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출발했고, 그는 기차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누가 볼까 봐 좀 부끄러울 만큼 그의 모습이 웃겼다.
2
서울을 채 벗어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원주였다. 사람이 꽤 많이 내리고 또 기차를 타는 사람도 있었다. 이 새벽에 정동진이 종착지인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갈까? 서울엔 있을 땐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가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별생각을 다 하나 싶었다. 원주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잠이 들었고 깼을 땐 영월이었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드린 지도 꽤 오래된 게 떠올라 날이 밝으면 꼭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또 잠시 잠들었다 깼을 땐 고한역이었다. 거의 1시간 단위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고한이 어디지, 하고 생각하다가 여기 스키를 타러 온 적이 있었단 걸 떠올렸다. 고한을 지난 뒤로는 잠이 오지 않아 계속 깨어있었다. 그렇게 기차는 태백역을 지나 솔안터널로 진입하고 있었다. 기나긴 솔안터널을 빠져왔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서울에선 그 문장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태백을 벗어나 삼척의 도계역으로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새벽 3시 반이었다. 아직 영동선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도계역을 지났으니 이제 동해시로 가는 이 기차는 해안선을 끼고 달릴 차례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이었다. 그래서 새벽이라 밖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동해역을 지나 해안가를 달릴 때 끝없이 펼쳐지는 암흑으로도 동해바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간에 불을 밝히는 민가도 없었지만 군데군데 잠시 빛나는 곳이 있긴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리고 망상과 옥계를 거쳐 11분이 연착된 기차는 4시 50분에 정동진역에 다다랐다. 드디어 정동진역 플랫폼에 발을 디뎠다. 보이는 역명판이 밝게 빛났다. 정동진의 새벽은 아직 잠잠했으나 곧 끝이 보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다는 아직 암흑이었지만 파도는 빛났다. 다시 여기에 왔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말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정동진의 새벽은 너무 추웠고 특히 바닷바람은 사람을 고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기에 온 걸 후회하진 않았다. 혼자 이 고요한 새벽에 덩그러니 남겨졌다면 무서웠겠지만 사람들이 꽤 많아서 그런 건 없었다. 차라리 날이 좀 밝고 나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이 있냐고, 좀 없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가질 만큼 붐볐다. 그리고 미리 생각해두었던 역 앞의 카페로 갔다. 24시간 동안 하는 카페는 이곳밖에 없었다. 주말이나 연말엔 사람이 많겠지만 오늘은 좀 덜했다. 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출 장소다 보니 사람은 많았다. 바삐 걸음을 움직이지 않았다면 자리를 잡지 못할 뻔했다. 예전에 왔을 때도 여기에 왔었는데, 마침 앉은 곳도 예전에 앉았던 자리였다.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조금 졸려서 잠을 청할까 싶었지만 깨워 줄 사람도 없으니 그냥 몸을 녹이는 것에 그치기로 했다. 그리고 7시가 조금 지났을 때 카페를 나왔다. 일출은 7시 37분이었지만 꽤 많이 밝아지기도 했고, 30분 정도 밖에 있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다로 나왔다. 여전히 바닷바람은 사람을 고되게 만들었으나 새벽 5시보단 좀 나았다. 평소라면 견디기 힘들어서 피할 생각만 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추워서 잔뜩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견딜 수 있다 싶었다. 먼동이 터오긴 했지만 해가 뜬 게 아니라서 아직 하늘은 잿빛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밝아지긴 했지만 계속 하늘은 잿빛이라 오늘은 해가 안 뜰 것 같다며 실망하는 말들도 종종 들렸다. 그러나 곧 해가 모습을 드러냈고 순식간에 떠올랐다. 일출을 자주 보는 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순식간에 떠오르는 해는 참 신기했었고, 다 알면서도 오늘도 신기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한 해의 하루가 이렇게 또 시작되었다. 일출을 보고 나니 꽤 많은 사람들이 백사장을 빠져나갔다. 나도 일단은 걸음을 움직였지만 어디로 갈 줄을 몰랐다. 그리 허기가 진 건 아니었지만 날이 추워서 밥부터 좀 먹어야 할 것 같긴 했다. 다음엔 어디로 갈 건지 밥을 먹으면서 생각해봐도 늦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밥을 기다리면서 카톡을 확인했다. 지난밤에 기차에 탄 이후로 일부러 카톡을 읽지 않았는데, 그리 궁금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확인을 했다. 다행인지 별일은 없었고 카톡의 대부분은 단톡방의 시시콜콜한 얘기들이나 그의 연락뿐이었다. 처음엔 잘 가고 있는지, 잘 도착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지만 내가 몇 시간 째 읽지를 않으니 꽤나 신경이 쓰였는지 보면 얼른 연락 달라는 카톡이 몇 통이나 와있었다. 걱정하는 그 마음은 알았지만 굳이 이럴 것까진 없을 것 같았는데. 계속 연락을 하지 말까 싶다가 더 호들갑을 떨까 봐 이제 봤다고, 미안하다는 카톡을 보냈다. 굳이 미안해야 할 건 없었지만 정말 미안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 빈말을 하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그는 걱정했다며 춥지는 않은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마침 밥이 나와서 이제 밥 먹으러 왔다고 출근 잘 하라는 카톡을 보낸 뒤 핸드폰 화면을 껐다. 그도 바쁜 아침이라서 그런 것도 있을 테고 밥을 먹는다고 했더니 더 이상의 연락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귀찮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와서까지도 이런 걸 신경 써야 하나 싶었다. 내가 이기적인 걸까 그가 유난스러운 것일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이기적인 사람 같겠지만.
밥을 다 먹고 식당을 나오니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차를 가져왔다면 일단 되는 대로 출발을 했겠지만 그것도 아니라 버스든 기차든 뭘 기다려야 했다. 날이 따뜻했다면 상관없이 일단은 무작정 걸었을 테지만 날이 꽤 추워서 그건 힘들 것 같았다. 그냥 발길 닫는 대로 돌아다니려고 했지만 교통편을 생각하고 행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나를 보자니 끊임없이 고민하고 계획을 하는 것 또한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성격 같았다. 일단은 강릉 시내로 들어갈지 아니면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갈까 고민을 했다. 처음 왔던 그때는 어땠는지 떠올려 봤지만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러나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정말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가장 빨리 오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마침 8시 28분 청량리행 열차가 있었고 선택지는 많았다. 묵호, 동해, 도계, 태백, 사북, 고한 그리고 영월. 새벽 기차에서 영월을 지나올 때 할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단 생각을 했는데 금세 잊고 있었다. 전화만 하는 거 말고 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부천 집 말고 영월 할머니집은 괜찮을 것 같았다.
정동진에서 영월은 기차로 3시간 정도 걸렸다. 기차는 다시 옥계와 망상, 동해의 바다를 끼고 달렸다. 겨울 바다는 시릴 만큼 푸르렀으며 금방이라도 베일 것만 같았다. 왜 베일 것 같다고 생각했을까? 해변의 철조망을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시릴 만큼 푸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날카로운 느낌이 들어서 그런 걸까? 깊고 묵묵한 바다란 생각이 들면서도 날이 서 있다 생각했다. 그렇게 기차는 동해를 빠져왔고 도계를 지나 영서로 접어들었다. 어느새 산이 높아진 걸 보니 정말 영동에서 영서로 접어들었구나 싶었다. 산이었고, 또 산이었다. 그리고 추전역을 지나 매봉산의 풍력발전기가 보일 때 잠이 슬슬 왔다. 그리고 또 고한을 지나쳤다. 여기 스키를 타러 온 적이 있었고 스키를 타러 왔을 때도 꿈에 나왔었다. 이 기차를 탔을 때가 꽤 자주 꿈에 나오곤 했지만, 그 꿈 또한 어지러운 꿈이었다. 앞으로 영월까진 1시간가량 남았는데 조금 자두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잠에서 깼을 땐 기차는 예미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영월까진 20분 정도 남았다. 할머니께 오늘 가겠다고 전화를 드려야겠다 싶었다. 할머니집에 전화를 드렸고, 곧 받으셨다. 영월에 들렸다고, 오늘 가겠다고 하니 알았다고 하셨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영월에 도착했다.
영월역에 내리니 11시 30분이었다. 여긴 정동진역과는 사뭇 달랐다. 정동진역 플랫폼에서 바로 바다가 보인다면, 영월역은 한옥 형식의 역사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선 보이지 않았지만 좀만 나가면 동강이 있다는 건 알았다. 할머니집이 영월이지만 항상 아빠의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기차로는 잘 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이르기도 해서 지금 당장 할머니집으로 가긴 그래서 다른 곳에 들렀다 가는 게 어떨까 싶었다. 생각난 곳은 여러 곳이 있었지만 을씨년스러운 청령포가 자꾸 생각나서, 역전의 택시를 잡아타고 청령포로 향했다. 10분 안팎으로 도착하는 곳이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선착장으로 내려왔다. 육지 속의 섬이라 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청령포였다. 언뜻 보기에도 강이 언 것 같은데 뱃길만은 녹아있어서 아직 그렇게 많이 얼진 않았구나 싶었다. 강의 폭은 좁아 금방 건널 수 있었다. 나는 더없이 이곳이 쓸쓸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예전에 왔을 때도 여기 참 쓸쓸한 느낌이 난다 싶었는데 어쩌다 여길 다시 와서 이렇게 쓸쓸함을 뒤집어쓰는지 몰랐다. 그렇게 걸음을 옮겼고 곧 노산대에 도착했다. 이곳의 풍경은 넓고 멀었으며 겨울의 서강은 맑았다. 이런 것을 쓸쓸함이라고 학습해왔기 때문일까? 왜 자꾸 쓸쓸하다 느껴지는지 몰랐다. 단종은 여기에 올라 한양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겼다고 했지만 서울을 떠나온 나는 그리워 할 것이 없었고 돌아갈 곳만 있었다. 그리고 그리워할 무언가가 있더라도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령포에서 나온 뒤 장릉을 갈까 하다가 할머니집으로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가는 건데 뭘 좀 사 들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읍내에 들렸다. 뭘 사야 할까, 다른 곳엔 선물을 잘 했으면 막상 할머니에게 뭘 사 들고 가야 할지는 내내 고민했다.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게 뭐였지, 영월에 올 줄 알았다면 옷이라도 사서 왔을 텐데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평소 좋아하시는 군것질거리도 사고 과일도 샀다. 고기도 샀고, 티셔츠도 하나 샀다.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 갔을까, 마을 초입에 할머니가 계셔서 내려달라고 했다. 추운데 왜 나와 계셨냐고 했더니 우리 보라 온다고 해서 나왔다고 하셨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아서 얼른 들어가자고 했다. 그렇게 들어온 집은 따뜻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계시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난방비 걱정 말고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용돈 많이 드리겠다고 하니 그저 웃기만 하셨다. 안 그래도 추운 곳인데 춥게 지내신다고 하니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나는 할머니가 가져다주는 과자와 귤을 까먹으며 따뜻한 아랫목에서 뒹굴뒹굴했다. 그러다 노곤해져서 깜빡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땐 해는 저물고 있었고 할머니는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다. 돕겠다고 하니 한사코 괜찮다고 하셨다. 내가 사 온 고기를 굽고 된장을 끓이고 밥을 안치는 저녁이었다.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잘 먹는 나를 보더니 보기 예쁘다고 숟가락에 고기를 한 점 더 얹어주시는 할머니였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이렇게 잘 먹은 적이 없었는데,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서도 또 배고프지 않냐며 이것저것 가져다주시는 통에 정말로 배가 불렀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물으니 마을회관에도 가고 산책도 나가신다고 했다. 적적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는데 이젠 정말로 적적하지 않으신 건지 아니면 손녀 앞이라 괜찮다고 하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또 내게도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부모님은 내가 곧 결혼한단 사실만 알렸지 다른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알렸다면 또 유산을 했단 얘기도 했어야 하는데, 안 알리길 잘하셨다 싶었다. 결혼 준비는 잘 하고 있냐는 얘기도 하셨고 남편 될 사람의 얼굴이 궁금하다고도 하셨다. 그래서 그와 찍은 사진 몇 장을 보여드렸더니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그가 어딜 가나 호감을 얻는 외모인 것이 이럴 땐 좋았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시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성실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나에게 잘한다고 하니 또 마음에 든다고 하셨다. 괜찮은 사람을 골랐다고 그러셔서 그냥 웃었다. 나는 그가 열렬히 좋아서 반려자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는 다른 사람에게 내보이기에 흠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좋았다. 그리고 그는 좋은 사람이 맞았으니까. 그렇게 10시가 조금 넘었다. 평소 이 시간이라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었겠지만 원래 이 시간 즈음에 주무시는 할머니와 함께 나도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할머니는 먼저 잠드셨고 나는 그에게 영월 할머니 댁에 왔다는 연락을 한 뒤 핸드폰 전원을 껐다. 오늘 밤은 부디 평온히 잘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시골은 시골이구나 싶었다. 옆을 보니 할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요즘 내내 지속되는 일정하지 못한 수면 패턴의 연장인 것인지, 짧고 얕은 잠은 나를 힘들게 하다 못 해 나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곤히 주무시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곤 아침이었다. 씻고 오니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괜히 와서 밥만 얻어먹고 가는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이었다. 곧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렇게 아침을 먹기 시작할 때였다.
“요즘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있냐?”
“그 친구요? 친구 누구….”
“예전에 같이 놀러 온 친구 말이다.”
“아, 아…. 그 친구요, 근데 그 친구는 왜요…?”
“그 애가 종종 기억이 나더라.”
“그 친구 잘 지내요. 근데 할머니 그 애를 아직도 기억하세요?”
“우리 손녀들만큼 예쁜 애들이 잘 없는데 그 친구는 눈이 큰 게 예뻐 가지고 기억을 하고 있었다.”
“예…. 그 친구 예쁘긴 예쁘죠.”
“그래 앞으로도 친구랑 계속 잘 지내고 해야 한다.”
“할머니 제가 애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
“다음에도 한 번 더 같이 와.”
“남편 될 사람하고 올게요.”
그 애의 얘기를 할머니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그 애와 함께 영월에 놀러 갔다가 할머니 집에 들러서 하룻밤 자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걸 기억하시는 걸까? 나는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내 주변인의 기억 속에 아직도 그 애가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때 같이 영월에 놀러 가기로 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애라 할머니 댁에서 자고 가잔 얘기는 생각조차 안 했었는데 자기가 먼저 할머니 댁에 가자고 했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냐고, 집에 사람 오면 좋아하신다고 네가 그러지 않았냐고 그래서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라 결국엔 같이 갔었는데 할머니께 참 잘했다. 낯도 많이 가리는 애가 할머니랑 말도 잘 하고 잘 웃었다. 그 이후로도 꽤 자주 그 애 얘기를 하곤 하셨지만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 애를 다 잊으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여기서 과거를 맞닥뜨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애의 얘기를 듣고 잘 지낸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준비는 전혀 되지 않아서 당황했고 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바로 숟가락을 놓긴 그래서 억지로 밥 한 공기를 비우곤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침을 먹고 나니 볕이 잘 들어서 집 청소를 하고 싶었다. 밥값은 하고 가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고 가면 할머니도 편하실 테니까 하는 마음이었다. 처음엔 청소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얼마나 걸리겠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시간이 참 많이 걸렸다. 대청소였다. 그리고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왔다. 겨울이라 황량했지만 할머니네 밭도 가보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농사를 지었던 논도 들리고 묘에도 다녀왔다. 그리고 이제 서울로 가보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더 있다 가라고 붙잡으셨지만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니 한사코 거절하셨지만 그래도 받으시라고 손에 쥐여 드리곤 나왔다. 추운데 밖에 나오시지 말라고 해도 문밖까지 나오셔서 어쩔 수 없다 싶었다. 곧 미리 불러 둔 택시가 왔고 영월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터미널에 도착했고 운행 시간표를 보니 강남으로 가는 버스는 5시 출발이었고 부천으로 가는 버스는 5시 10분이었다. 부천으로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부천행 버스를 보니 부천으로 갈까 싶다가도 그냥 서울로 가기로 했다. 더 이상 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갈 곳도 생각이 안 났다. 집을 떠난 지 며칠 됐다고, 계획 없이 어딜 다니는 건 꽤 힘든 일이구나 싶었다. 나는 센트럴행 버스에 올라탔고 2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오늘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그는 미리 터미널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고 그는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줬다. 내가 없는 집이 너무 쓸쓸했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잘 다녀왔냐는 말엔 그렇다고 짧게 답했다. 잘 다녀오고 못 다녀올 것도 없는 여행이었고, 언제 한 번 같이 영월 할머니 집에 같이 가자고 했다.
3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잠은 좀 잘 잤지만 꿈을 꾸는 건 여전했다. 이제 어지럽다고 말하기엔 익숙해진 것 같아서, 이젠 굳이 어지럽기보단 그냥 그 애가 나오는 꿈을 아주 자주 꾼다고 하기로 했다. 그 꿈이 소멸하길 바랐지 익숙해지는 걸 원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 잠이라도 잘 자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그가 며칠간 해외로 출장을 갔고, 오랜만에 절친한 친구 동생들을 만났다. 결혼 축하한다는 얘기, 옛날얘기, 그냥 우리 사는 얘기…. 술을 잘 하거나 좋아하진 않지만 몇 개월간 술을 못 마셨는데, 오랜만에 술도 몇 잔 하며 꽤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그렇게 아파트에 도착해 주차까지 마쳤을 땐 새벽 1시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데 문이 곧 닫힐 것 같았다. 하지만 뛰기는 싫어서 그냥 보내려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쪽에서 날 발견했는지 문이 다시 열렸다.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타게 됐고, 누군지 확인하진 않은 채 고맙단 인사를 하던 찰나였다.
“신보라.”
그 목소릴 듣자마자 소름이 돋았다. 누구신데 내 이름을 아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잊지 못했다. 그 애였다. 그 애가 맞았다. 그 애 말고는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신보라, 신보라 맞지?”
하필 왜 여기일까?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그냥 지나치기라도 했을 텐데, 아니라고도 해볼 텐데, 여긴 피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 미미야.”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예전에 좋았던 시간을 같이 보냈고, 지금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싶었다. 그리고 왜 굳이 내가 흔들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여기 살아?”
“응, 너도 여기 살아? 그간 본 적 없었는데.”
“아니, 누구 만나러 온 거야.”
“아…. 여기 자주 와?”
“아니, 자주 안 왔어. 그리고 앞으론 안 올 것 같아, 오늘 만나러 온 사람 좀 있으면 이사 가거든.”
“아 그렇구나….”
이 늦은 시간에 누굴 만나러 왔을까 싶었지만 굳이 궁금해하거나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난 그냥 뭐 똑같지, 일하고 일 없으면 쉬고.”
“그렇구나….”
“넌 어떻게 지냈어?”
정미미는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냥 화제전환을 위한 의례적인 얘기겠지만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넘겨야 할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인 정미미와, 결혼을 앞두고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하릴없이 놀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은 너무 대조되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굳이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지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할 필요도 없었고 하지도 않을 거지만 처음으로 일을 그만둔 게 싫고 자존심이 상했다. 정미미가 어느 정도 유명해질 무렵부터는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그 차이는 계속 커져만 갔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해졌고 정미미와 나의 차이도 많이 줄어들거나 크게 차이가 없을 텐데 이렇게 자존심이 상하고 내가 싫을 수가 없었다. 내 노력으로 이룬 것과 내 노력이라곤 없는 걸 누리고 있는 그 차이를 정미미의 앞에서 이렇게 느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또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나 그냥… 그냥 별일 없이 지내.”
“그래… 혼자 살아?”
“아니, 나 곧 결혼해서 남편 될 사람하고 살아.”
“아 결혼해? 축하해.”
“고마워.”
“근데 있잖아, 보라야. 남편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실례됐다면 미안.”
“아니야 괜찮아, 남편 될 사람…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좋은 사람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야, 그 정도면 좋지.”
“다행이다 그럼. 아 맞다, 나도 축하할 일 있는데.”
“무슨 일?”
“음… 좀 있으면 기사 뜰 거야.”
“왜 뭐길래 얘길 안 해줘.”
“그냥, 지금 얘기하는 것보단 나중에 기사로 봐.”
“그래, 아무튼 축하할 일이라니까 축하해.”
“고마워.”
무슨 일이길래 말도 안 해주고 저렇게 축하부터 받으려고 할까, 뭐가 됐든 축하받을 일이면 좋은 일이지 싶었다.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다다르자 정미미는 왼쪽 눈썹을 찡긋하더니 가보겠다며 내렸다. 그리고 나도 곧 17층에서 내렸다. 집에 왔을 때, 우리 집 바로 밑에 정미미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헤어진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걸음이면 아래층 집에 절대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발소리가 아래층에 들릴까 걸음조차 제대로 걷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만큼 유난스럽게 반응한다 싶었다. 어쨌든 한 번은 이렇게 마주칠 거라면 준비가 된 상태에서 잘 만났으면 좋았겠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게 있고 할 수 있는 말이 더 많아질까, 다만 오늘 새벽의 꿈에 정미미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이젠 여기에 올 일 없다는 그 말이 내 감정을 좀 가라앉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새벽 늦게 다니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정미미를 만난 이후로도 여전히 똑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애를 만났다고 해서 당장 무언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 또한 그 뒤로 정미미를 만난 적은 없었다. 정말로 여기 올 일이 없다고 하더니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새벽잠을 설치거나 꿈을 꾸고 일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로 살았고, 그날도 새벽에 절로 눈이 떠졌다. 그가 깰까 봐 조심히 거실로 나와 영화를 보려다 티비를 틀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마침 정미미가 나오는 리얼리티 재방송이 시작하는 걸 봤다. 이런 걸 봐서 뭐하나 싶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지만 딱히 재밌는 것도 없었다. 요즘 정미미의 리얼리티가 인터넷에서 꽤 언급이 되는 바람에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그냥 그걸 보기 시작했다. 정미미의 광고 촬영 현장과 얼마 전 개봉한 영화의 무대 인사를 부지런히 다니는 게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고 정미미의 집이 나왔다. 여전히 예전에 살던 집에 살고 있었다. 방송에선 정미미의 집이 최초로 공개가 되는 거라고 떠들어 댔지만, 나는 저 집을 속속들이 다 알았다. 전 애인의 집이었고 한때 나도 살던 집이었다. 저 집에서 같이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저 집을 모를까, 그런데 이젠 집을 옮길 법도 한데 왜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다가도 정미미는 헤어짐과 집을 굳이 결부 짓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나랑 헤어졌다고 해서 굳이 이사까지 갈 필요를 못 느끼거나, 아니면 그냥 저 집이 좋아서 계속 사는 걸 수도 있지 싶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적당히 집을 소개한 뒤엔 배우들 리얼리티가 다 그렇듯 관리 잘 된 맨얼굴을 보여주기도 하고 아끼는 물건을 보여주기도 한 뒤에 당연히 사적인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뻔한 구성이다 싶으면서도 다들 이런 게 제일 재밌다고 느끼니까, 그리고 사실은 나도 그 애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예전의 나야 정미미에 대해서 가장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로 단절되어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내가 아는 정미미는 그저 과거의 사람일 뿐이었다. 현재의 정미미가 대단히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그 사생활을 소비하고 싶은 마음도 아니었다. 다만 한때나마 연인이었던 사람이 그간 서로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잘 살고 있었는지, 그것만 궁금할 뿐이었다. 정미미는 원래도 자기 힘든 얘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했다. 힘든 얘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자기뿐만 아니라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면 다 거쳤을 과정이라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모습은 여전히 정미미답다 싶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을 때도 그 힘듦을 다 몰랐는데 이렇게 단편적인 모습으로 뭘 알 수 있을까, 그냥 어련히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애 얘기가 나왔을 땐 크게 웃더니,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났고 헤어졌다고 했다. 더 얘기해달라고 하니 지난 얘기라고 말을 아끼다 결국엔 입을 뗐다. 나는 보지 말까 하다가 지금의 정미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었다. 처음엔 후회가 많이 남았지만 이젠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다고, 얼마 전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앞으로도 계속 잘 살길 바란다며 더 이상은 얘기할 게 없다며 웃었다. 차라리 나를 나쁘게 얘기해줬다면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저렇게 얘기해주니 이제 정말 우리는 정말로 각자의 길을 걸은 지 오래되었구나 싶었다.
4
나는 정미미를 당시 소속되어있던 기획사에서 만났다. 성인이 되기 전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부모님 몰래 영상학과에 원서를 넣어 합격을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다른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꾸준히 영화나 방송계통의 일을 하고 싶어서 연기학원을 다녔고 스물한 살에 기획사에 입사했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드라마의 조연을 맡기도 했고, 걸그룹 연습생이 됐다.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물론 연기도 배웠다. 하지만 걸그룹 연습생이었기에 춤과 노래가 더 우선시 됐었고, 어쨌든 그것 또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임했었다. 몇 번의 데뷔가 무산되고 연습생들이 나간 자리를 또 다른 연습생들이 채우는 일들이 몇 년간 반복됐고 정미미 또한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이었다. 스물셋의 가을이었다. 당시 회사에선 동갑이 없었고 내가 여자 연습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동갑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데도 친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회사에 처음 온 그 애를 봤을 때,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고 정말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지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좋았다. 아무 말이라도 붙이고 싶어서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집에 갈 때도 같이 가자며 먼저 팔짱을 끼곤 했다. 그리고 무작정 정미미가 사는 영등포 집까지 가서 치킨을 얻어먹기도 했고. 꼭 붙어있는 나를 처음엔 당황스러워하다 나중엔 귀찮아하는 티를 내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아서 얘가 나를 싫어하진 않구나 싶었다. 처음엔 정미미와 내가 동갑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말을 했는데 알고 보니 정미미는 빠른이라 나보다 학교를 한 해 일찍 다녔다. 그땐 진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학교에서 만난 것도 아니고 밖에서 만난 건데 이런 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싶은 마음도 들었고.
“저기 있잖아.”
“왜?”
“어… 너 빠른이라며.”
“응.”
“학교 92랑 같이 다녔지.”
“응.”
“아… 진짜 나는 몰랐거든, 동갑이래서 그냥 같은 93인 줄 알았지.”
“그게 왜? 나 빠른이면 언니라고 부르게?”
“불러줄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음… 그럼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
그 때 정미미가 푸하하, 하고 웃던 모습은 아직도 선하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미미야, 미미야 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애가 갑자기 어색한 얼굴을 하곤 언니라고 불러줄까라고 묻는 꼴이라니, 정미미의 입장에선 웃길 만도 했다.
“왜,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야 됐어, 이제 와서 무슨 언니야.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줄게. 하던 대로 해 그냥.”
“진짜…?”
“그래 무슨 언니는 언니야, 근데 그거 알아? 근데 나 사실 94랑도 친구다? 빠른 94랑도 친구고 93이랑도 친구고 92랑도 친구야.”
그냥 그 뒤론 그런 게 어딨냐며 장난스럽게 넘기긴 했지만 나는 이제 와서 무슨 언니냐고 하던 대로 하라는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정미미가 좋았다. 그 전에도 좋았지만 그땐 친해지고 싶다는 감정이 컸다면 그 이후론 정말, 정말로 사랑의 의미를 담은 좋아함이었다. 만약 정미미가 자길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으면 그렇게 좋아하게 됐을지 혼자 생각을 해보기도 했고 나중엔 정미미와도 이때 얘기를 했다. 어쨌든 내가 내린 결론은 어떤 식으로든 정미미를 좋아하지 않을 순 없었겠지만 이렇게 좋아하게 된 계기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정미미와는 더 친해졌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밝은 사람이었으나 자꾸만 무산되는 데뷔와 함께 유달리 어린 사람을 선호하는 그 업계의 특성 상 나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다른 건 노력하면 되지만 그건 내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 스트레스를 어디 풀지도 못한 채 온전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미미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얼마나 더 고되게 버텼을까, 그래서 더 많이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는 스물넷이 됐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때, 나는 준비하던 걸그룹 데뷔조에서 빠지게 됐다는 걸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 이런 일은 이쪽 업계에선 비일비재했지만 그 비일비재한 일이 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그 팀에 최종적으로 합류하지 못한 이유는 나와 이미지가 비슷하고 나이는 더 어린 연습생이 내 자리를 꿰찼기 때문이다. 그래도 회사는 내가 아까운지 걸그룹말고 배우로 곧 데뷔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몇 몇 배우들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도 걸그룹 데뷔조였지만 걸그룹 대신 배우로 데뷔했고 더 잘 풀리지 않았냐는 식으로도 얘기를 하고 정 걸그룹이 하고 싶다면 데뷔조 멤버를 구하는 다른 회사에 연결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당장 결정을 내리긴 어려우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곤 회사를 나왔다. 데뷔조가 몇 번이나 엎어진 걸 겪은 나는 다른 회사로 가는 것 또한 그게 얼마나 불확실한 일인지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무산된다면 내 나이로는 더 이상의 걸그룹 데뷔는 현실적으론 가망이 없었다. 그럼 이 회사에서 배우를 준비하는 건 어떨까, 기약 없는 생활을 또다시 할 수 있을까? 여기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확신해서도 안 됐다. 지금은 내게 배우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언제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불확실함을 염두에 두고 계속 연습생으로 계속 있느냐, 선택지는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동안 숙소에도 갈 수 없었고 부천 집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며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대학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했다. 회사에 내 결정을 알리고 숙소로 가 짐을 쌌다. 같이 살던 애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서 왔는데, 빈 숙소에서 내 짐만 빼는 게 어찌나 서글펐던지 기어코 눈물이 났다. 스무 살 이후로 그렇게 엉엉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울고 집으로 돌아갔을 땐 눈물이 말라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부천 집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에겐 일이 잘 풀리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으니 다시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몇 년간 허송세월을 했다는 식으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도 인생에서 값진 경험을 했다고 나를 위로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다. 2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고 휴학했기에 가을에 복학을 할 예정이었으니 몇 달 시간이 남았는데 그동안에 알바도 하고 전공 공부도 다시 할 예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딱 3일을 쉰 다음 오전엔 어학원을 다녔고 오후엔 알바를 시작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착실히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었고, 나는 빠르게 생활에 적응했다. 완전히 상처가 아물거나 미련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만하면 잘 살고 있었다. 그렇게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앞에 누가 서 있었다. 누군지 짐작은 갔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쪽이 먼저 나를 아는 척했다. 설마가 맞았다. 정미미였다.
“야, 신보라.”
정미미는 늘 그렇게 나를 불렀다. 반가웠다. 다른 건 몰라도 정미미는 잊고 산 적이 없었으며, 잊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매일 정미미를 생각했기에 오랜만에 듣는 저 말도 매일 듣던 사소한 말 같았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은 많이 달라졌지만 정미미와 나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어, 미미야 어떻게 왔어?”
“오늘 휴가받았어.”
“아 그렇구나,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핸드폰도 없는데 어떻게 연락해.”
“아 맞다… 근데 그렇다고 이렇게 오면 어떡해, 나 언제 올 줄 알고.”
“오늘 못 만나면 내일 오고, 내일 못 만나면 또 다음에 휴가받으면 오고, 그러려고 했지.”
“많이 기다렸어?”
“….”
“많이 기다렸구나.”
“괜찮아, 기다릴 만했어.”
“음… 카페 갈래? 내가 커피 살게.”
내가 먼저 앞장섰고 정미미는 내 뒤를 따라왔다. 카페에 들어간 뒤 뭘 먹겠냐고 물어보니 여전히 스무디를 먹겠다고 했다. 그냥 알면서도 물어본 거였다. 그렇게 주문한 음료가 나오고 우리는 조금 어색하게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이제 데뷔 얼마 안 남았지?”
“….”
“데뷔 전에 마지막 휴가야? 곧 데뷔한다는 기사 봤어.”
“신보라.”
“왜?”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나? 나 오전엔 어학원 다니고 저녁엔 알바 해. 어학원 영어랑 불어랑 2개 다니는데 영어는 회사 있을 때도 계속 공부해서 따라가기 그렇게 안 어려운데 불어는 3년 동안이나 안 하니까 다 까먹어서 힘들더라. 나 가을에 복학하는데 공부 못 따라가면 안 되니까 더 열심히 하려고.”
“지금 그렇게 지내는 거 어때? 괜찮아?”
“나쁠 거 없어, 괜찮아.”
“너 회사 왜 나간 거야? 다른 회사엔 왜 안 갔어?”
“그냥, 그렇게 된 거 내 길이 아닌가 보다 싶었지, 학교 돌아가서 졸업하고 취직할 거야.”
“너 배우 꿈이라고 했잖아.”
“그랬었지, 배우 하고 싶었고 연예인 하고 싶었어.”
“그래, 하고 싶었잖아. 난 네가 그럴 줄은 몰랐어, 나는 네가 계속할 거라고 생각했어.”
“나를 어떻게 본 거야?”
“다른 사람은 다 그만둬도 너는 안 그만둘 줄 알았지!”
씩씩거리는 그 모습이 사실은 웃겼다. 피식 웃었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왜 웃냐는 말이 돌아왔고, 너는 화내는 모습도 예쁜데 웃기긴 하단 말을 어떻게 정미미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웃는데 정미미가 더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후회 안 해, 괜찮아. 그리고 데뷔 축하해.”
“….”
“내가 너 나오는 거 다 챙겨볼게, 넌 진짜 잘 할 거야.”
“너도 잘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진짜 내가 아쉬워서 그래, 회사에서 배우 데뷔하자고 그랬다며, 아니면 다른 회사도 소개시켜준다고 했다며, 근데 왜 그만뒀어?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너 아니면 누가 해.”
“미미야,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마운데, 그래도 어쨌든 내가 선택했고 나 열심히 잘 살아서 좋은 데 취직할게. 너는 꼭 잘 될 거야, 나중에 유명해져도 나 까먹으면 안 돼, 알았지?”
정미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착잡한 얼굴로 있었다. 그 애의 착잡한 얼굴을 보는 건 나도 힘들었다. 다른 이유였다면 잘하지 못하는 위로라도 했을 텐데, 이유가 나 때문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야, 신보라.”
“응, 미미야.”
“이제 이 얘기 안 할게.”
“응, 하지 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 하자 우리.”
“근데 너 나한테 안 물어본 거 있어.”
“그래? 나 뭐 안 물어봤지?”
“왜, 왜 왔냐고 왜 안 물어봐?”
“아… 내가 그거 안 물어봤어? 맞다 안 물어봤네, 미안해. 근데 좀 쑥스러워서 그래, 왜 나 보러 왔냐고 물어보는 거.”
막상 정미미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왜 나를 보러왔을까? 사실 우리가 친하게 지내긴 했어도 언제 만날 보장도 없는데 이렇게 왜 왔을까? 그제야 좀 궁금했다.
“미미야, 오느라 고생 많았지. 여기까지 왜 나 보러 왔어?”
“….”
“물어봐달라고 해서 물어봤는데?”
“….”
“막상 얘기하긴 좀 그런 거야? 무슨 일 있어?”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얘가 왜 말을 못 하는 걸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겨서 나를 찾아온 걸까? 무슨 일일까.
“보고 싶어서 왔어.”
“어?”
“보고 싶어서 왔다고, 신보라 너 보고 싶어서 왔다고.”
“나 보고 싶었다고?”
“응, 너 보고 싶어서 왔어. 진짜 너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의외다, 예상 못 했는데.”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아니, 나도 너 보고 싶었지.”
나는 네가 매일, 한시도 빠짐없이 보고 싶었단 말을 하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미미가 먼저 이렇게 말을 할 걸 알았다면 내가 먼저 보고 싶다고 말을 할 걸 그랬다 싶었다.
“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넌?”
“꼭 말을 해야 해?”
“응, 말해줘.”
“싫어.”
“그럼 나도 얘기 안 할래, 네가 나 먼저 찾아왔잖아, 하고 싶은 말 있으니까 이렇게 먼저 찾아온 거 아니야? 너 말하면 나도 말할게. 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휴가 동안 너 기다릴 생각할 만큼, 이렇게 찾아올 만큼…”
보고 싶다는 말은 결국엔 못하고 웅얼거리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정미미였다. 이해했다. 정미미 성격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싶었지만 그걸 보는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금방이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이런 말마저 지금의 분위기를 깰까 봐 하기 싫었다.
“미미야, 정미미.”
“왜, 신보라.”
“나 보러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고, 음… 나도 너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 정말, 정말 많이 하루도 안 빠지고 보고 싶었어.”
내 말이 끝나자 씩 웃는 정미미를 보니 더없이 좋았다. 내가 다른 건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정미미의 그리움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몇 마디를 더 했을까, 이제 카페 마감 시간이라는 얘길 들었다.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전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정미미는 가기 싫다고, 안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마음 같아선 같이 있고 싶지만 휴가 첫날인데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막차를 태워 보냈다.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서도 온통 정미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좀 있으니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와서 누구냐고 물어보니 정미미였다. 어머니 폰으로 연락하는 거라고, 내일도 또 만나자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다. 그래서 정미미의 2박 3일 휴가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고 정미미가 숙소로 복귀하는 날, 내가 고백하려고 했지만 정미미가 먼저 내게 고백했다. 나는 당연히 받아들였고 압구정에 있는 숙소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정미미가 먼저 괜찮다고, 부모님이 차를 태워 주시기로 했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고, 나는 어쩌면 내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그룹의 사진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데뷔를 하면 모든 영상도 다 챙겨볼 예정이었다. 그게 내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면서도 정미미를 볼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애가 좋았다.
나는 대학에 복학했고 그 애는 데뷔를 했다. 나는 핸드폰도 없는 정미미의 이메일과 어쩌다 한 번 나오는 휴가를 기다리며 살았다. 물론 그것만 기다리느라 내 삶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고, 각자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산 이유는 내가 남들보단 조금 늦은 나이에 대학에 복학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안 된다는 약간의 조바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고, 그다음엔 정미미는 열심히 사는데 나만 편하게 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또한 아주 가끔씩 정미미가 너무나 보고 싶고 외로운 마음이 들어서 그걸 잊고자 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26살이 됐을 때, 정미미는 데뷔 3년 차가 되었고 나는 대학 4학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 모두 다 각자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고 걱정이 깊었던 시기였다. 잘 될 거라고 말은 했지만 나도 졸업과 취직에 대한 걱정이 있었고 정미미도 본인의 입지에 대해서 티는 안 내도 걱정이 좀 됐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 해엔 정미미의 아이돌 일도 잘 풀리고 개인으로도 꽤 괜찮은 영화와 드라마를 찍으며 필모그래피를 차근차근 쌓았다. 나 또한 졸업 전에 취직을 했다.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때부터 우리 사이는 좀 편해지기 시작했는데, 정미미는 핸드폰이 생겼다. 그건 여전히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일방적으로 연락을 기다리는 일은 없다는 의미였다. 연애 3년차가 되어서야 연애 초기처럼 내내 카톡을 주고받고 전화를 할 수 있으면 전화를 했다. 우리 다시 연애 초기로 돌아간 것 같단 얘기를 하면 정미미는 질색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1년 뒤 정미미는 숙소를 나와 독립했고, 나는 자취방을 처분하고 정미미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 시기가 연애를 하면서 가장 편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같이 살더라도 일정한 근무시간이나 휴일이 없는 정미미의 직업 특성상 나 혼자 집에서 정미미를 기다리는 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게 힘들거나 서럽진 않았다. 연락도 제대로 못 해서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도 있었고 그 애의 휴가만 기다리고 거기에 내 모든 스케줄을 맞췄던 걸 생각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같은 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보고 자고 싶어서 새벽 내내 선잠을 자는 일상도 좋았고 가끔 정미미의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면 같이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밥을 시켜 먹는 것도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우리의 관계가 딱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아마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내심 했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당연히 없었고 우리 또한 그랬다. 한 번 정점을 찍고 나니 어느 순간부턴 예전의 우리가 아닌 것 같단 걸 느꼈다. 단지 오래 만났으니 익숙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점점 예전에 하지 않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브라운관에 나오는 그 애가 부럽단 생각을 했고, 영화를 만드는 걸 배우지 않은 것과 영화에 나올 수 있었던 기회를 전부 놓쳤던 과거가 자꾸 어른거렸다. 그래도 정미미니까 저렇게 잘 된 거지 저렇게 성공할 수 있단 보장도 없는데 괜히 후회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이라는 식으로 애써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자체가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그 애는 점점 더 화려해졌지만 나는 계속 별다를 것 없는 회사원이었다. 이제 대화를 해도 서로의 일과 환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너무 다른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때라고 뭐가 달라졌을까, 환경이 너무 달라졌다는 건 핑계거리에 불과했고 사랑이 식었기에 예전만큼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우리 너무 붙어 있으니 익숙해져서 서로의 소중함에 무뎌지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정미미의 집을 나왔다. 그 이후론 내가 정미미를 먼저 기다리는 일은 잘 없었다. 집에 있다고 하면 남는 시간에 갔고, 아주 가끔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게 전부였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선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재미없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어서 소모적인 가십거리나 얘기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이루던 것들이 하나둘씩 무너져 갔다. 핸드폰도 없어서 이메일을 주고받고 어쩌다 휴가를 나오는 게 다였던 숙소 생활을 하던 아이돌 생활도 다 견뎌놓곤 나중 되어선 사소한 이유들을 견디기 힘들어서 헤어짐을 결심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명확한 잘못 때문에 관계에 금이 간 것도 아니라서 헤어짐에 많은 감정을 소모하기 싫었고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어차피 헤어지자는 말만 안 했지 헤어진 거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몇 년을 함께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있어야 했다. 그래서 헤어짐을 고하던 그 날은 예전처럼 정미미의 집에서 정미미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새벽 3시가 넘어서 온 정미미를 한 번 안아주곤 미리 생각해둔 말을 꺼냈다.
“미미야, 나 이제 너희 집 안 올래.”
“왜?”
“새벽에 좀 자야지 나도. 잠 못 자고 출근하니까 피곤하더라.”
“그럼 앞으로 낮에 만날래? 내가 시간 낼게.”
“아니, 이제 안 할래.”
“그래… 그럼 그러자 우리.”
“그럼 나 갈께, 잘 자고.”
“잘 가.”
“안녕.”
우리 이별은 그게 끝이었다. 정미미는 나를 딱 한 번 붙잡았고 나는 그걸 거절했다. 그 이후론 더 이상 날 잡지 않았고, 나 또한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자연스레 소원해진 게 이유였으니 서로 아무도 탓하지 않고 잘 헤어졌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우리의 6년은 허무할 만큼 조용히 끝났다. 이제 나의 밤과 새벽은 더 이상 정미미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사실에 친구들을 불러 심야 영화를 보거나 술자리에 나가기도 했다. 그게 대단히 즐거운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잊기 위해 억지로 좋은 척을 하는 건 더욱더 아니었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엉엉 울고 싶을 때가 있었으나 그 순간만 지나면 또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지낼 동안 정미미는 쉴 새 없이 광고를 찍고 영화도 찍고 오랜만에 드라마까지 한 편 찍었다. 그 와중에 몇 번의 열애설이 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전부 사실무근으로 일관했다. 어쨌든 유명인을 전 애인으로 두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티비만 틀면 얼굴을 볼 수밖에 없고,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알아야 했다. 모든 매체와 단절한 삶을 산다면 모르고 살겠지만 또 그러고 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그냥 한때나마 좋았던 사람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됐다 싶은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아니면 자꾸 정미미를 그렇게 봐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불편했기에.
어쨌든 나는 나대로 살다 보니 지금의 그를 만났다. 그를 대단히 사랑하거나 연애가 재밌었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고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하는 것만큼은 편하고 좋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만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에도 큰 부담이 없었다. 같이 연습생을 할 때는 정미미를 친한 연습생이라고 몇 번 소개한 적은 있었지만 정말 우리가 만난 이후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정미미를 소개할 수가 없었다. 아이돌일 땐 휴가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아까워서 그랬고, 배우 일을 본격적으로 할 땐 너무 유명한 사람이라 조심스러웠다. 친구라고 소개하기도 조심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있었을까? 우리 연애에선 우리밖에 없었고, 나 또한 늘 정미미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항상 연락을 기다리고, 정미미의 남는 시간을 기다리고, 정미미의 사생활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를 기다리는 일들이었다. 분명히 그것들이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미미와의 연애는 너무나 재미있었고 사랑하니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지속되지 않아서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것들은 나의 일방적인 희생이 되어버렸다. 기다림에 점점 지쳐갔고 정미미 주위의 사람들, 또는 정미미와 나를 자꾸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그 일 자체에 미련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정미미에게 한 번도 그런 얘길 하지 않았고 그저 모든 걸 이해해주는 착한 애인의 자세를 취하다 말았다. 차라리 터놓고 얘기를 했다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일방적인 희생이라는 건 자기 연민에 취한 것밖에 되지 않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모른 채 나니까 너를 이해하고 희생한다는 시혜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의 대화가 단절된 건 여간해선 힘든 얘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그 애의 성격적 부분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별다를 것 없는 사람인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이미 너무 늦었다.
차라리 우리는 못나게 헤어졌어야 했다. 둘 중에 누군가가 진짜로 잘못을 하고 눈에 보이는 균열이 생겨 그걸 붙여보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그게 쉬이 되지 않는 걸 탓하고 예전의 좋았던 때를 떠올리며 네가 변했다 목소리를 높여 싸우기도 하다가 결국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회한과 원망으로 점철된 결말을 맺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잘못한 게 있더라도 마음 놓고 너를 미워하며 울고 욕하다 어느 순간엔 그걸 다 털어냈겠지만 시간 속에 묻어만 두고 살았으니 이렇게 결혼을 앞둔 지금 다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얼마 전 읽은 ‘잊자고 생각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둔 지금, 잠을 설치고, 잠에 들더라도 자꾸 정미미와 함께했던 때가 꿈에 자꾸 나타나는 걸 보면 정말로 우리 함께 했던 그때는 쉽게 잊을 수 없었던 때가 아닌가 싶었다.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우리 둘 다 바쁘기만 바쁘고 손에 쥔 것은 없었던 연애 초기 때였다. 나는 정미미와 함께 정동진을 처음 가봤다. 그때도 이렇게 추운 겨울이었다. 휴가라고 해도 2박 3일 정도가 전부라서 서울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 할 때였다. 그러다가 우리 이번만큼은 좀 멀리 가보자고 했던 게 정동진이었다. 정동진에 갈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가겠다고 아껴놓은 곳이었다. 그래서 우리 이번엔 새벽 기차 타고 정동진에 가자고, 바다도 보고 일출도 보자며 얘기하니 정미미도 좋아했다. 함께했던 새벽은 많았지만 이렇게 기차에서 보내는 새벽은 처음이지 싶었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했던 때였기에 한시도 떨어지기 싫어 새벽을 달리는 그 기차에서도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고, 그러는 동안 정동진에 도착했었다. 사실 그 추운 겨울 바다가 그렇게 좋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정말 바다나 일출 같은 것보단 우리가 함께 멀리 새벽을 같이 보내며 바다를 보러 갔다는 그 자체가 더 좋았음이 분명했다. 그 이후론 정미미가 휴가를 받아 나오면 서울에만 있기보단 함께 스키를 타러 가기도 했고, 할머니집에 가기도 했었다. 둘 다 아무것도 없을 때였지만 그래도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그래서 그때가 자꾸 꿈에 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젠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우리 그때 참 사랑했었단 말도 하지 못 할 삶이 곧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도 애써 이유를 모른다는 식으로 덮어놓고 부정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나도 그 때 많이 서툴렀고 잘못했단 사실을 깨달은 게 다 무슨 소용일까? 이제는 그냥 다 털어버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나중엔 혼자 끅끅거리며 울다가 혹시나 자는 그를 깨울까 싶어 욕실의 샤워기를 틀어놓곤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우는 건 오늘 새벽이면 족했다. 앞으로도 계속 잘 살길 바란다는 그 애의 말처럼 아침부터는 정미미의 전 애인이 아닌 온전한 나로 잘 살고 싶었다. 그리고 정미미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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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온 나라가 정미미의 결혼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그 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뭔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싶어 하던 게 이거였구나 싶었다. 미리 얘기해주지, 그럼 더 진심을 담아 축하한다는 말을 했을 텐데 싶어 아쉬웠다. 그리고 공개된 결혼날짜는 4월 30일이었다. 우연치곤 참 얄궂다 생각했지만 그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알게 된 것이 있는데, 얼마 전 이사를 간 16층 사람이 정미미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에 대해선 이런 저런 얘기들이 떠돌아다녔지만 그런 건 크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정미미가 고른 사람이니 행복하게 살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여기 살지 않고 이사를 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도 이젠 정말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내가 그를 선택했기에, 이왕 선택한 거라면 그와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내 친구가 결혼한다고 우리도 이제 식을 올리자고 했다. 그는 환하게 웃었고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 날 이후로 나는 바쁘게 결혼식을 준비했다. 결혼 준비는 꽤 사람을 고단하게 만들었고 어느샌가 나는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 메리지 블루는 이제 끝인 것 같았고, 그냥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