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보라
저번 주부터 틀기 시작한 히터 소리가 조금 거슬렸다. 먼지 때문인지 목이 좀 따가운 것 같아서, 작은 가습기를 샀는데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었다. 나름 비싸게 산 건데…. 여전히 따가운 목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여기저기서 키보드를 달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침부터 계장님은 과장님께 깨지고 왔는지 직원들의 근무태도에 대한 얘기로 열을 내고 계셨다. 그래 봐야 제대로 듣는 사람이라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직원뿐이었다. 불쌍하기도 하지 내가 저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아마 두 달 내로 사직서를 쓰지 않았을까? 그뿐이었다.
한참을 멍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일이 많았다. 월말이라 그런지 이것저것 처리할 게 많았고 연락해야 할 곳도 많았다. 타 부서로, 타 기관으로 따가운 목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 보니 그새 아침 시간이 다 가고 있었다. 겨우 11시가 조금 지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어서 조심스럽게 카톡을 켜보니 메시지가 꽤 밀려있었다. 그 중엔 미미에게서 온 것도 있었다.
[보라야, 지금 일해?]
[밖에 눈 와, 첫눈인가 봐]
화면 위에 꼭 미미를 닮은 얄밉게 생긴 복숭아 캐릭터가 하트를 그리면서 씰룩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이모티콘도 꼭 자기 같은 것을 썼다. 미미의 카톡에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누군가가 눈 얘기를 한 것도 같은데. 바쁜 탓에 그냥 넘겼었나 보다. 창밖의 하얀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이 피로해짐을 느끼며 질끈 감았다. 설렐 수 있는 감정마저 히터에 말라버렸나 보다. 그다지 감흥이 들지 않았다. 그저, 퇴근할 때 저 눈이 쌓여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게, 너는 일어났어?]
[아직 이불 ㅋㅋㅋ 오늘 오후 수업이야]
핸드폰을 쥐고 있기라도 했는지 금방 답장이 왔다. 같이 덥던 이불을 몸에 꼭 두르고선 누워있을 미미를 떠올리자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한 다섯 시간 전만 해도 나도 거기에 있었는데.
[다시 자서 늦지 말고, 아침도 좀 먹구]
톡을 보내놓고 다시 워드 창을 띄웠다. 오늘도 잠을 거의 설쳤다. 바쁘긴 하지만 가능하면 내 일을 전부 끝낸다면 추가근무 없이 바로 퇴근하고 싶었다. 누워있을 미미를 생각하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아니, 아닌가. 어쩌면 내리는 눈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늘에서 무언가 내릴 땐 언제 나도 늘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내린다.’라는 표현보단 ‘늘어진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아래로 축 늘어진 그런 모양새가 된다. 늘어질 대로 늘어진 채라 어디든 얼른 눕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쌓인 일을 처리해야 했다. 눈을 깜빡이고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요즘 들어 캄캄한 새벽쯤에 혼자 눈을 뜨는 일이 잦아졌다. 일이 바빴다. 겨우 취직하고 1년을 채워가고 있었다. 사무실은 늘 계장님 때문에 시끄러웠다. 전달받아야 할 일이 제대로 전달된 적이 드물었고, 넘겼던 일들이 한 번에 넘어간 적이 드물었다. 날이 갈수록 피곤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종종 잠에서 깨는지도 몰랐다.
그러게 휴학이라도 하지, 조금 쉬고 취직을 하지.
그런 소리도 여러 번 들었지만 사실 그보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 단번에 취업한 것에 대해 부러움을 더 많이 받았다. 야 그래도 축복받은 거지. 그런 말들을 가만히 귀에 담고 흔들어보다가 간지러워진 탓에 귀 밖으로 흘려버렸다.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은 아는 척을 하기 싫어서 곧장 흘려보내려 하는 편인데 꼭 그런 말들은 귓속에 지나간 흔적을 남긴다. 말이 지나간 길이 화끈거렸다.
정미미는 나를 축하함과 동시에 안쓰러워했다. 바로 취직할 수 있던 것을 축하했고, 휴학 한번 없이 바로 일을 시작한 것을 안쓰러워했다. 치이고 치여서 녹초가 된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옷을 갈아입고, 씻고 그대로 불도 안 켠 채로 침대에 쥐죽은 듯이 누웠다. 잠들지 않더라도 그냥 하염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대로 미미가 올 때까지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그런 날이면 종종 그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해보고 싶은 건 해봤으면 좋을 텐데.’
둘이 같이 집에서 술을 마시던 날, 미미가 조용히 말했던 그 말. 별생각 없이, 별 뜻 없이 단순히 내게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뜻으로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할 때의 미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로 아주 조용히 말했으니까. 눈을 깜빡이다가, 슬그머니 입술 아래를 깨물었다. 나도 그럴 여유가 있었으면 그랬겠지. 지금도 버는 돈의 반절 이상이 집으로 갔다. 엄마의 병원비, 동생의 학원비…. 하나하나 세기 귀찮을 정도로 많은 곳에서 돈이 빠져나갔다. 아빠가 버는 돈으로는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부터 쌓이던 부채를 갚는 것도 급급했다. 모든 게 돈이었다. 지금이야 덜 했지만 취업 전까지만 해도 공부하는 것도, 옷을 사 입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오죽하면 숨 쉬는 것도 비용이 들지 않을까 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 날들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내가 그랬었다고 미미에게 쏘아붙일 순 없는 일이었다.
속에서 까끌거리는 말은 도저히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걸 뱉으면 내 속은 좀 편안해질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이 까끌거리는 것을 날카롭지 않게 뱉을 순 있을까? 그것도 자신이 없었다. 편안해지지도 않고, 부드럽게 말할 자신도 없다면 그냥 삼키고 있는 게 나았다. 어떻게 봐도 그저 독이었다. 독임을 알면서도 뱉지 못해 삼키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독.
나는 스스로 내 삶이 부싯돌 사이에서 튀어나온 불씨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몸이 깎일 만큼 부딪혀 태어났으면서도 잠깐 반짝하고 마는 그런 불씨. 어딘가 옮겨 곳이 없으면 제대로 불이 붙지도 않는 그런 불씨 말이다. 아마, 이렇게 평생을 부딪쳐도 잠깐 반짝하고 끝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함이 언제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타지 않아, 타오르지 않아. 그런 시시한 생각들은 언제나 내 기를 죽이면서 한편으로는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게 또 싫으면서 좋았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나조차 정확히 몰랐다. 그냥 그랬다. 생각이란 게 다 그렇다. 그냥, 나는 원래 그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 덕분에 이제는 미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학기가 시작하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미미는 몇 년간 길어오던 머리를 짧게 단발로 쳤다. 덕분에 머리카락 끝이 미미의 턱 아래에 닿아 있었다. 지난겨울이 끝나기 전 미미는 몇 번이나 내게 단발로 자를지 말지를 물었다. 나는 미미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좋아해서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볼 때면 대부분 커트를 말렸다. 그렇지만 미미는 학기 초에 아무런 말 없이 덜컥 머리카락을 자르고 왔다. 퇴근 후 미미에게 ‘결국 잘랐네?’하고 물으니 그냥 오늘은 정말 잘라보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고 싶은 건 해본다.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정미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며칠간은 짧은 머리가 익숙하지 않다며 투덜거렸고, 칭얼거렸고, 징징거렸다. 그렇지만 정미미는 자르지 말걸. 이라는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이제는 스스로 단발에 적응했는지 오히려 자르기 전보다 귀엽고 어려진 것 같다며 좋아했다. 미미가 스스로 그러니 나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단순히 미미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들은 모두 그래 보이는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생각조차 낯선 것들을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지금까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라는 대로 공부를 했고 성적이 나온 대로 대학교를 들어갔다. 여러 학교, 여러 과 중에서 가장 이름있는, 가장 취업 잘되는, 평가가 좋은 곳들을 추려 뽑았다. 들어가고 나니 막상 전공 관련해서 취업하기보다는 공무원으로 취업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말에 다시 공부했다. 일 년, 학기와 함께 한 공부였지만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역시 신보라라는 말을 들었다. 역시 신보라.
역시 신보라.
‘역시 신보라’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큰 사고 없이 자라달라는 그대로 자란 모난 곳 없는 딸. 다툴 일이 거의 없는 친구. 하라는 것만큼만 잘 해주는 후배. 부탁을 잘 들어주는 선배. 그러면서도 모두가 어려워하는 신보라.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옆에서 잠들어있는 미미의 숨소리를 들었다. 새근거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 일의 각각 스물네 시간 중에 가장 미미가 조용한 시간이었다.
"처음에 다 너 어려워하더라."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 했다. 처음에만? 그럼 너는? 애써 그 질문을 참고 크림이 가득 찬 3800원짜리 빵을 들어 올리는 미미를 가만히 바라봤다. 미미가 빵을 베어 물자 안에 들어있던 크림들이 입술 주변에 묻었다. 입안의 빵을 오물거리며 입술 주변의 크림들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미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게, 넌 딱 여기까지. 라는 느낌이잖아"
미미는 빵가루와 크림이 조금 묻은 검지로 마주 앉은 허공에 직선을 그었다. 어쩐지 익숙한 얘기긴 했다. 차갑다. 냉정하다. 정이 없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다만, 주로 선생님이나 친하지 않은 어른들에게서 듣던 말을 미미에게 들으니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미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빵을 쥐었다. 그럼 왜 너는 그런 내 옆에 있을까? 학기 초부터 꾸준히 이곳저곳 같이 가자며 끌고 다니고, 따라 다니던 미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선 내 몫의 빵을 먹어치웠다. 입술에 묻는 크림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정미미는 불씨 같았다. 불인 주제에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고 어디든 내려앉으면 불을 붙이는 생명력 강한 불씨. 불씨이자 불. 금방 꺼져버릴 듯한 나와는 다른 불씨. 활기차고 시끄럽고 활동적인 정미미는 꾸준히 내 옆에 붙어있었다. 친해질수록 투명하게 보이는 정미미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선부터 마음까지 나를 따라다니면서 툴툴거리기는 엄청 툴툴거리고 성 떼고 이름만 부르는 것조차 낯간지러워하는 정미미. 그 목소리나 표정까지 나에게 좋아한다고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 같은데 정작 목소리로는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는 정미미. 내가 그어놓은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오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바라볼 땐 시침을 뚝 떼고 저 멀리 멀어져 버리는 정미미. ‘딱 여기까지’라고 그어진 선이 그런 정미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미미가 그렸던 그 선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버렸다.
어쩌면 그 ‘좋아해’라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 행동 하나하나 전부 사실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라고’ 세뇌를 시키는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 얘는 나를 왜 이렇게 좋아할까? 라는 마음이 어느 순간 반대가 되었던 것 같다. 학기가 끝나고, 다시 학기가 시작하기 전 나는 미미에게 고백했다. 그 순간 본적 없던 가장 낯설고, 가장 미미다운 표정이 아직 선명했다.
다시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그 말을 소리 없이 웅얼거려보았다. 입 주변에 묻었던 빵가루보다 더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낯선 것 들은 언제나 낯간지럽다. 이런 것들과 낯을 탄다는 게 어쩐지 조금 속상하면서도 우스웠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이라는 말보다는 해도 되는 것, 그래도 괜찮은 것. 이라는 말이 더 익숙했다. 해도 괜찮은 것과 괜찮지 않은 것….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건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
어쩌면 괜찮지 않은 것 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하고 싶지만 괜찮지 않은 것.
해보고 싶지만 하면 안 되는 것.
그런 게 뭐가 있지? 곰곰이 생각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괜찮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지 않은 것들을 생각에서 배제해버린 것은 아닐까. 내 기준에서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서 자연스럽게 미미의 것을 빌려보았다. 늘 길게 길러온 머리를 짧게 잘라보기, 휴학해보기, 갑작스럽게 여행 가보기…, 생각해보면 그다지 어려운 일들은 아니었다. 한다고 해도 그렇게 놀란 반응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주변을 놀라게 할 정도면... 퇴사 정도? 아마 그러면 모두가 놀라긴 하겠지만 그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해보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일…, 그렇게 나는 스스로 또 지체됨을 느꼈다.
눈을 깜빡일수록 생각이 깊어질수록 잠이 달아나는 걸 느꼈다. 오늘도 네 시간이나 잤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러고 있다 보면 금방 또 아침이 올 텐데. 이러니까 늘 피곤하지. 미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옆으로 돌아 똑바로 바라본 미미는 새근거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어두운 탓에 미미의 밝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적갈색으로 보였다. 적막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에 들리는 소리는 모두 컸다. 잠들어있는 미미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 가만히 숨소리를 맞추었다. 쌔액-, 하고 삼켰다가는 뱉고 다시 쌔액. 하고 삼켰다가 뱉고... 가만히 숨소리를 맞추려니 숨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깊게, 더 많이 쉬고 싶은데 이렇게 짧게 숨을 쉬면 숨이 막히지 않을까. 너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숨으로 편하게 잘 수 있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흐읍. 하고 깊게 숨을 삼키고 길게 숨을 내뿜고, 그냥 나는 나대로 숨을 쉬기로 했다. 억지로 호흡을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창문을 가린 블라인드 위로 옅고 푸른 색채가 칠해진다. 온전한 나의 새벽이 끝나갔다. 또 아침이 오고, 하루를 시작하겠지. 나는 어제와 달라졌을까? 새벽을 스치듯 지나치며 고민해본다. 나는 하루의 끝을 지났었나, 하루의 시작을 지났었나. 새벽은 애매하다. 애매해서 시작인지 끝인지도 확실히 하기가 어렵다. 날짜는 넘어갔는데 나는 어제로부터 이어진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도 새벽처럼 애매함으로 칠해진다. 뭔가를… 뭐라도 확실히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나를 조인다.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도록 누군가 시간에 슬레이트를 쳐줬으면 좋겠다. 잠깐 쉬고 갈게요. 하고 ‘탁’.
미미야, 너는 앞으로 뭘 하고 싶어? 잠든 얼굴에 가만히 물었다. 너는 뭐든 하고 싶지 않을까? 뭐라도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그런 너를 보며 내가 종종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는 걸 너는 알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눈을 감는 저녁이나 뜨는 아침에 네 옆에 내가 없다는 생각. 딱히 싸운 적도 없고 사이가 소원해진 적도 없지만, 그냥 그런 생각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마음을 꾹 짓누른다. 어쩌면 내 숨이 모자란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너는 나의 부재를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싸운다거나, 헤어진다거나 그런 것들보다 그냥 단순히 내가 네 옆에 없다는 막연한 생각.
막연한 것들은 꼭 그 단어처럼 막연하게 다가와서 선명하게 짓누른다. 분명 나는 널 사랑하고 있는데 함께 있을 미래보다 내가 없는 네 미래 따위를 생각해보고는 그렇게 짓눌린다. 그런 내 생각을 혹시 미미가 알까 봐, 짓물린 마음에서 풍기는 이 악취를 네가 맡을까 봐 무서웠다. 너는 내가 없어도 늘 너처럼, 말 그대로 ‘미미처럼’잘 지낼 것 같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그려진 네 미래에서 내 자리를 빼도 그렇게 티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너는 내 생각만큼 나를 좋아할까? 너는 나와 하고 싶은 게 있을까? 혹시 너도 나처럼 문득 새벽에 눈을 떠서 잠든 나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그렇게 가만히 바라볼 적엔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너는 나의 부재를, 혹은 나에게서 너의 부재를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2. 정미미
‘정미미’
한자로 아름다울 미(美)자를 두 번 써서 정 씨하고도 미미. 정 미미. 내 이름을 지으실 적에 아름답다는 말을 두 번 적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는지 아니면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라셨는지 그도 아니라면 둘 다 바라셨는지는 몰라도 그 어느 쪽도 마음에 들었다. 아름다워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아름답게 살아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아름다움’을 두 번 써서 정 미미.
정미미. 라는 이름을 노트에 꾹꾹 눌러 적으며 아주 옛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미미라고 적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을 아주 옛날의 기억. 부끄러웠기 때문에 더 당당해져야 했던 어린 기억. 나는 어릴 적부터 뭔가를 숨기는 것에 약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해도 금방 티가 나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티를 냈다. 다른 것들, 다른 감정들을 부풀린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부풀린 감정들이 타인에게 원래 제 것처럼 보일 때 까지 부풀리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된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 어쩌면 내게는 숨기는 것에 소질이 없는 대신에 원래부터 ‘그렇게 만드는 것’에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안경을 쓰고 책에 있는 문제를 노트에 옮겨 풀었다. 일 학년 때, 과제를 항상 문제를 먼저 정확히 적고 그 밑에 풀이를 써내라고 하셨던 교수님 덕분에 이제는 이게 버릇이 되었다. 보라 자신도 늘 그렇게 했으면서 내가 이렇게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한번은 그렇게 빤히 바라보고 있는 보라에게 괜스레 뭘 그렇게 보냐며 타박했던 적이 있다. 보라는 나와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예뻐서’라고 대답했었다. 예쁘다는 말에 면역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민망했다. 너무나 민망했던 나머지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 ‘뭐야~’하며 넘어갔음에도 종종 안경을 끼고 있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났다. 다른 사람에게 수없이 들어왔던 말도 보라에게 들으면 어쩐지 그 느낌이 달랐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해서 그런 걸까.
펴고 있던 책과 노트를 반씩 겹쳐서 닫은 후에 책상 위에서 일어났다. 안경은 공부할 때만 끼기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안경을 벗었다. 보라는 왜 평소에는 안경을 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야, 귀찮으니까. 책 위에 안경을 올려둔 채 스탠드의 불빛을 껐다. 늘 보라는 형광등을 켜도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스탠드를 켜는 게 집중이 잘 된다며 거절했다. 무엇보다 형광등을 켤 때면 벽으로 몸을 돌려 자는 보라 때문에 늘 스탠드를 고집했다. 보라는 나보다 일찍 자고 일찍 깼다. 조용하고 가라앉은 것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내가 이 적막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건 아마 모두 보라의 숨소리 덕분일 거란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책상 안으로 의자를 집어넣었다.
그것과 별개로 그냥 보라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해.
보라는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조용하다거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별개였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정제하는 과정 같았다.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중에서 꺼낼 말들을 정해서 내뱉는다. 그 꺼낼 말을 정하는 과정에서 보라의 말들은 정제를 거친다. 그렇게 내뱉어진 보라의 말들은 어쩐지 ‘정말로 그런’ 말들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없이 가만히 있는 보라는 어쩐지 조금 무서웠다. 그런 상태로 있는 보라는 대부분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었다. 수많은 말 중에 꺼낼 말이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런 순간들을 대부분 직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거름망이 촘촘히 박혀있는 듯한 보라의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면 나는 그냥 눈을 감거나 돌렸다. 저 안엔 무슨 말들이 가득할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커다래서, 혹은 거름망이 너무 촘촘해서 나오지 못한 말들은 어디로 갈까. ‘정말로 그런 말’들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사귀기 전에 언젠가 한 번 보라가 내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는 내가 왜 좋아?’ 학기가 끝나던 날이었고, 다음 학기엔 어떻게 할지 막연히 얘기한 뒤였다. 그 날은 겨울답게 조금 추운 날이었고, 이제 무얼 할 거냐는 너의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같이 걷던 중이었다. 막연히 신보라의 곁에 있고 싶은 날이었고, 나를 부르는 수많은 시끄러운 무리보다는 이렇게 조용히 걷는 게 훨씬 더 좋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냥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장난으로 넘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물은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신보라였고, 그 질문은 당연히 내가 신보라를 좋아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고, 눈을 몇 번을 감고 뜨는 동안 보라의 눈이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편도, 많이 걸러서 하는 편도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머릿속이 첫눈처럼 하얬다.
“빨갛다”
“어?”
“엄청 차가운데?”
보라는 손바닥으로 내 오른쪽 귀를 덮었다가, 조심스럽게 말아쥐며 만지작거렸다. 추위 탓에 귀가 얼었는지 그 감각들이 뭉툭하게 느껴지다가 이내 선명해졌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탓인지 순식간에 귀가 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근데 또 뜨겁다. 그렇게 말하던 보라는 웃으며 손을 뗐고, 그 감각이 너무 간지러워서 가슴 속부터 무언가 울컥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니, 아닌가? 그냥 가슴 속이 통째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후로 어떤 생각으로 걸었는지, 어디를 갔었는지, 어떤 말을 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헤어지기 전에 보라가 너무 춥다는 말을 했고, 방학 잘 보내라는 말을 했으며, 웃으며 두 손바닥이 다 보이게 손을 흔들던 신보라가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종종 신보라를 생각했다. 그 기간의 하루는 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보라는 만나는 날과 그렇지 못하는 날. 그렇게 생각하며 제일 놀랬던 것은 신보라를 의식하기 전후로 별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자주 신보라를 생각했었고, 생각했다. 생각을 생각보다 많이 한다는 것은 조금 재밌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분명 내 생각인데 멋대로 내 생각을 지나쳐버리는 것은 이질적이었고 모순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랬다.
내가 신보라를 좋아하는구나. 보라의 질문에 깔린 전제를 스스로 납득했다. 이전까지 누군가를 좋아한다거나 사귀어본다거나 그런 경험이 없던 것은 아닌데도 그건 정말 낯설었다. 그러니까,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본다거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그렇게 묻던 보라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수없이 많은 가정을 내려보는 것들.
블라인드로 가려진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옅게 들어왔다. 보라는 언제나 나보다 일찍 잤고 일찍 깼다. 나보다 먼저 눈을 감고, 나보다 먼저 눈을 떴다. 때문에 자정 근처와 초 새벽은 늘 나의 시간이었다. 나는 네가 왜 좋을까? 침대에 올라가지 않고 바닥에 앉아서 잠든 보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보라의 가슴께가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고민했다.
예뻐서, 착해서, 조용해서, 편해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억지로 떠오르는 것들을 세어갔다. 열 손가락을 다 접고 나서도 뭔가 속이 시원치 않아서 입술을 삐죽이다가 손가락을 다 펴버렸다. 그리곤 침대 위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얼굴을 기댄 채로 가만히 보라를 바라봤다. 얼굴이 하얘서, 머리카락이 까매서, 또 길어서. 아무리 생각해도 순서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보라를 좋아하는 건지. 보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보라는 나를 좋아할까? 왜 좋아할까. 우리는 낯간지러운 말을 잘 주고받는 편은 아니었다. 일단 내가 그런 말들을 잘 못 했으니까. 한다면 대부분 보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었다. 장난스럽거나 혹은 너무 담백하거나 보라는 그런 식으로 말했다. 예쁘다는 말부터 좋아한다는 말까지 전부 신보라의 몫이었다. 예쁘게 정제된 말들을 받을 때면 마치 섬세하게 세공된 보석을 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에 비해 내가 하는 말들은 툭 치듯 가볍게 나와 투박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보라가 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이었다면 절대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럼에도 신보라는 그 돌멩이같이 투박한 말에도 쉽게 감동했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못되게 굴었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울 때도 있어서, 잉잉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여러 의미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런 보라가 좋았다. 왜를 찾기 전에 그냥 좋은 점들이 생각난다. 흘리듯 말한 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거, 그래서 어딜 가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점이 좋았다. 싫은 말을 잘 못 하는 거, 그래도 해야 할 말이면 어렵사리 꺼내면서 모난 곳들을 다 깎아서 조심스럽게 말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내 이름을 부를 때 참 예쁘게 부르는 거, 언제나 정미미가 아니라 미미야. 하고 부르는 점이 좋았다. 그렇게 부를 때면 늘 ‘미미야’ 대신 ‘밈미야’ 하고 마치 노래처럼 부르는 점이 좋았다. 장난스럽게 자기야 하고 처음 불렀을 때 그 놀라고 낯설어 하면서도 좋아하던 모습이 좋았다. 그렇게 불릴 때면 언제나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종종 아무런 위화감 없이 그 낮은 목소리로 ‘자기야, 근데…’ 하고선 말을 하는 게 좋았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는 걸 말해주기까지 모르는 점도 좋았다. 그래서 좋았다.
가만히 누워서 네가 좋은 점을 세다 보니 정말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너도 내 좋은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느낌일까? 너는 내가 좋은 점을 세어보긴 할까? 깨어나면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언제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걸까. ‘정말 그런 것들’만 골라서 말하는 너라서, ‘너는 내가 왜 좋아?’라고 묻던 그 순간부터 정말 너를 좋아하게 된 걸까.
슬슬 눈꺼풀이 느리게 닫히는 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면 보라의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았다. 함께 잠들 수 있다는 거 내가 잠들 때 옆에 잠든 네가 있는 게 좋았다. 그래서 새벽이 좋았다. 아침엔 늘 네가 먼저 일어나니까.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방금 내가 한 것처럼 보라가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둘씩 세어준다면 좋을 것 같다고. 부끄럽고 민망할 게 뻔했지만 그래도 듣고 싶다. 새삼스럽게 깨어있는 시간을 더 많이 공유하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시간이 조금 더 많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같이 하고 싶은 것, 같이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나 블로그 혹은 주변 지인의 입소문을 통해 들은 좋은 것, 좋은 곳들을 메모해두거나 나만 볼 수 있게 비공개로 공유해놓은 글이 여러 개였다. 아마 다른 것 없이 내가 봐둔 것들만 해도 우리는 평생을 연애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너를 바라보다 보니 의식할 틈 없이 잠든 네 숨을 닮아갔다. 새벽의 네 숨소리는 적막 속에 유일한 노래이고, 자장가였다. 내 하루 끝에 네가 있음이 좋았다. 좋은 만큼 네가 없는 하루의 시작이 아쉬웠다. 너도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나를 바라보며 내 생각을 할까? 깨어있는 나를 보며 잠들 때, 잠들어 있는 나를 보며 일어날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해?